'하루 1조원'과 '하루 8만2560원'

파이낸셜뉴스       2026.04.26 18:10   수정 : 2026.04.26 18:54기사원문

하루에 1조원. 18일에 18조원.

지난 23일 삼성전자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가 개최한 '4·23 투쟁 결의대회'에서 사회에 던진 숫자다.

최승호 삼성전자 초기업노조 위원장은 "올해 영업이익이 300조원 이상으로, 하루에 약 1조원"이라며 "총파업기간 18일을 멈추면 18조 가까운 공백이 생긴다"고 외쳤다. '투명하게 바꾸고 상한 폐지 실현하자'라는 피켓을 든 참가자들은 '째째용'이라는 문구가 적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진을 밟는 퍼포먼스도 했다.

'억대 연봉'과 '파업 투쟁'이라는 이질적 단어가 공존하는 집회 현장은 참가자들의 열기로 예상보다 뜨거웠다는 게 현장 취재기자의 전언이다. 한 조합원은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파업하면 되지 왜 5월까지 기다리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노조는 이날 결의대회를 기점으로 투쟁 수위를 격상, '5월 21일~6월 7일 총파업 투쟁을 한다'는 투쟁지침 2호를 공식화했다.

지금 기세로 봐선 파업이 현실화될 분위기다. 삼성전자 경영진보다 더 속이 타들어 가는 게 협력사 직원들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반도체 엔지니어의 연봉은 1억원 후반에서 성과급 포함 시 3억원대에 이르는 반면, 이들의 생산을 지탱하는 1·2·3차 협력사 기술인력의 평균연봉은 5000만원 수준이다.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차 협력회사는 1061개사, 2·3차 협력회사는 693개사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생산 차질이 본사 내부에서 끝나지 않고 원청보다 체력이 약한 1·2·3차 협력사로 전이될 수 있다는 뜻이다. 파업으로 생산이 멈추면, 협력사 정직원은 버티겠지만 비정규직, 파견, 용역 노동자들은 휴업·감원 압박에 놓이게 된다. 2026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1만320원. 하루 8시간 근무 기준으로 일당은 8만2560원이다. '하루 1조원'과 '하루 8만2560원'이 맞물려 있는 파업인 셈이다.

다른 대기업들 파업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물류, 식당, 주변 자영업까지 매출 급감이 현실화될 전망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증설 작업이 진행 중인 평택에는 하루 2만명 안팎의 인력이 투입될 만큼 지역경제 파급력이 크다. 공장 가동과 투자 일정이 흔들리면 물류·식당·숙박·주변 자영업까지 연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2024년 반도체 업황 악화로 인한 투자 속도 조절을 이유로 P5 생산라인 공사 중단 결정 후, 현장에서 일하던 일용직 건설 노동자와 협력업체 직원 수천명이 한꺼번에 철수하며 평택 고덕신도시 일대가 큰 충격을 받았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평택 지역의 아파트 시장은 미분양의 무덤으로 불렸다.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분양받은 사람들이 입주를 미루면서 소송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협력업체와 파견·용역 노동자, 지역사회 등은 물론 '비(非)반도체' 대기업 직원들의 박탈감을 몰고 온 억대 성과급 논란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반도체 산업의 초과이익이 원청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집중 배분되고, 동일한 생산 생태계를 구성하는 협력사 노동자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현행 구조는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한다.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 직원들의 보상이 6배 가까이 차이 나는 '극단적 이중구조'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만성적 리스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세제 혜택, 국가 인프라 투자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이 때문에 반도체 산업에서 발생한 초과이익을 청년고용 기금, 협력사 기술인력 양성 펀드, 지역사회 상생 기금 등으로 환원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 볼만하다. 국가 경제의 핵심 산업을 떠받치는 반도체 투톱 기업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에만 몰두한 채, 같은 생태계 안의 협력사 노동자와 청년고용 문제를 외면하는 현실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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