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상징 '대형평수', 노년엔 현금 먹는 '짐'
세 놓고 소형 이사 가면 월 200만원은 세이브
'익숙함'과 결별 빠를수록 노후 현금흐름 개선
세 놓고 소형 이사 가면 월 200만원은 세이브
'익숙함'과 결별 빠를수록 노후 현금흐름 개선
[파이낸셜뉴스] 올해 초 딸을 시집보낸 서진수 씨(가명·59)는 요즘 집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들에 이어 딸까지 출가하며 부부만 남은 서울 소재 148.76㎡(45평형) 아파트. 이제 생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
서 씨는 "청소할 때마다 둘이 살기엔 집이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아이들이 놀러오면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보다 관리비 부담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머리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지난해 말 명예퇴직 이후 매달 들어오던 급여는 사라졌다. 반면 관리비와 세금, 건강보험료 등 집을 유지하기 위해 나가는 비용은 오히려 무거워졌다. 집 규모를 줄이면 연간 수천만원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도 이미 끝냈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익숙한 동네를 떠나는 것, 주변의 시선, 그리고 20년 가까이 쌓아온 삶의 흔적을 내려놓는 일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21억 자산가...'통장은 매달 마른다'
서 씨가 2000년대 초반 5억원대에 매입한 이 아파트는 현재 시세 21억원 안팎이다. 20여 년 만에 4배 이상 불어난 자산이다. 지인들은 노후가 걱정없을 것 같다면서 부러워한다.
하지만 서 씨는 통장만 보면 불안감이 커진다.
퇴직 이후 매달 빠져나가는 주거 유지비만 약 104만원이다.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며 재산이 반영된 건강보험료가 33만원, 관리비는 40만원 수준이다. 여기에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를 월로 나누면 약 30만원이 추가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달 104만원이 빠져나간다. 이는 서 씨의 월 생활비(약 300만원)의 35%에 해당한다.
은퇴한 서 씨는 퇴직금 3억원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월 지출은 약 300만원. 이 구조가 유지된다면 3억원은 약 100개월, 9년이면 바닥을 드러낸다. 59세에 퇴직했으니 68세가 되기 전에 소진된다는 계산이다.
"오늘이 제일 싸다"...오를 일만 남은 보유세
올해부터 이 비용은 한층 무거워질 전망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6년 공동주택 공시가격에서 서울 평균 상승률은 18.67%로 202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세 21억원 아파트의 공시가격은 현실화율 69%를 적용하면 약 14억5000만원이다.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 기준인 공시가격 12억원을 넘어서 종부세 납부 대상이 된다.
올해 서 씨가 부담하는 재산세와 종부세 합산 보유세는 약 364만원(연간)이다. 이를 월로 환산하면 30만원꼴이다. 강남·한강 인접 지역의 경우 공시가격 급등에 따라 보유세가 전년 대비 최대 50% 이상 증가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집은 건강보험료에도 부담이다.
직장을 떠나는 순간 지역가입자로 전환되고 보유 부동산의 재산세 과세표준이 건보료 산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공시가 14억5000만원을 기준으로 기본 1억원을 공제한 재산과표에서 월 33만원 안팎의 건강보험료가 발생한다. 퇴직금을 운용해 이자·배당 수익이 발생하면 소득분이 추가된다.
집이 든든한 자산이기도 하지만 노후를 좌우하는 '비용 구조'가 된 셈이다.
"왠지 망한 거 같아서"...알면서도 못 줄인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은퇴자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KB경영연구소가 내놓은 '2025 KB골든라이프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59.7%가 주택 다운사이징을 고려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응답자의 48.1%가 실행 시점을 70대로 잡고 있었다. 머리로는 결단을 알지만 실행까지 10년 이상이 더 걸린다는 뜻이다.
이유는 숫자가 아니라 감정이다.
첫째는 자녀와의 연결고리다.
둘째는 의료 접근성이다. 대형 병원이 가까운 수도권 인프라를 포기하기 어렵다. 합리적 우려이기도 하다.
셋째는 낙오에 대한 공포다. 평생 수도권 핵심지에서 살아온 X세대에게 이사나 집 규모 축소는 삶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비합리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장벽이다.
같은 보고서는 이 심리를 숫자로 보여준다.
살던 집, 살던 동네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에 동의하는 비율이 80.4%로 2년 전보다 14.3%p나 급등했다. 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버티는 것이 한국 은퇴자의 실질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구조를 바꾸면 불안은 줄어드는가
이미 결단을 내린 사람들도 있다. 다만 결과는 단순하지 않다.
서울 아파트를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간 박종훈 씨(가명·62)는 일정한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하지만 "매달 적자를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은 맞지만, 생활이 완전히 여유로워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나 의료비는 여전히 부담이다.
수도권을 떠나지 않은 선택도 있다.
집을 전세로 돌리고 소형 주택으로 옮긴 이정희 씨(가명·61)는 자산 일부를 유동화해 월 150만원 수준의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서울을 떠나지 않은 점은 만족스럽지만, 전세 시장 상황에 따라 수익이 달라질 수 있다는 불안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구조를 바꾸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방식'이 달라진다.
세 가지 길 앞에서
은퇴자에게 선택지는 세 가지다.
△수성 : 지금 집을 유지하며 비용을 감당하는 방식. 자산은 보존되지만 현금은 줄어든다.
△이동 : 집을 줄이고 자산을 현금화하는 방식. 유동성은 확보되지만 생활 환경의 변화를 감수해야 한다.
△분리 : 집은 유지하되 거주를 분리해 임대 수익으로 현금 흐름을 만드는 방식. 전세 시장 리스크가 따른다.
어떤 선택이든 완벽한 해답은 없다.
결론은 '차선의 선택'
서 씨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방 이주와 전세 활용을 모두 검토 중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다. 21억원이라는 숫자가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구조로 버티느냐다.
집값은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노후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현금이다.
'최선의 선택'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익숙한 삶을 포기하는 것도 자산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차선의 선택이다. 집을 당장 팔지 못하더라도 일부를 유동화하거나 거주와 소유를 분리하거나 지출 구조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다.
어떤 결정이든 중요한 것은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이다. 선택을 미루는 사이에도 통장은 계속 줄어든다. 문제는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는 점이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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