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숫자가 아닌 스토리다

파이낸셜뉴스       2026.04.30 18:42   수정 : 2026.04.30 19:04기사원문
'이란전쟁으로 불황이 올 것이다'
1970년대의 오일쇼크 떠올리며
불안·공포에 휩싸이며 전전긍긍
데이터나 수치에 의존하기보다
사회에 퍼진 그럴싸한 스토리가
한 국가의 경제 좌지우지하기도

이란전쟁으로 전 세계 미디어가 2개월째 들썩이고 있다. 트럼프의 말 한 마디에 경제가 출렁이고, 개인투자자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증시를 주시한다. 물가 폭등이 예고되면서 사재기가 극심해지기도 한다.

경제는 뉴스에 민감하다. 이란전쟁이 언급되는 순간 외환위기나 1970년대 오일쇼크의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대중의 뇌리에는 물가가 폭등하고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며 이는 곧 경기침체로 이어진다는 고전적 시나리오가 즉각적으로 재생된다. 복잡한 지정학적 분석이나 그 어떤 수치와 증거보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유추가 머리 안에서 빙빙거리며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기름값이 3000원이 된다더라"와 같은 카더라 소식통에 빠르게 반응하게 되고, 일어나지도 않은 유류비 상승에 대한 공포심리는 곧바로 소비위축으로 이어진다. 실제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진 않았지만 "앞으로 살기 힘들어진다"는 서사에 설득되는 순간 지갑을 닫기 시작한다. 이란전쟁은 단순히 기름값이 오르는 사건을 넘어 우리의 의식 너머 깊이 자리한 '불확실성'과 '공급망 공포'라는 서사를 건드리는 강력한 트리거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란전쟁이 호르무즈해협 봉쇄 등 물류를 막아버리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 불안'을 자극한다. "한국은 자원 하나 없는 나라다. 중동전쟁이 터지면 끝이다"라는 비관론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뉴스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원자재 확보를 위해 선제적으로 가격을 인상하고, 소비자는 사재기 심리를 보이는 사회적 전염이 일파만파 퍼지게 된다. 게다가 한국 경제의 취약성인 '대외 의존성'을 강조하면서 '원화가치 하락'에 대한 공포 섞인 이야기가 정설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전쟁이 나면 원화는 휴지조각이다. 지금이라도 달러를 사고 금을 쟁여둬야 살아남는다"는 '썰'과 함께 '환테크'나 '안전자산 확보'에 대한 방법론이 바이러스처럼 퍼지게 된다. 실제 환율이 급등하게 되고, 이로써 원화 약세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는 수입비용 상승으로 이어져 다시 또 인플레이션 내러티브를 강화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로버트 실러 교수는 그의 저서 '내러티브 경제학(Narrative Economics)'을 통해 '인간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달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집을 안 사면 평생 못 산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다"와 같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 저녁 모임 자리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이 한 국가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 바로 이런 스토리의 전염성 때문이다.

실제로 믿기 힘든 이야기라 할지라도 반복적으로 듣게 되고, 가볍게나마 남에게 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것이 진실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야기'는 그런 효과가 있다. 게다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증가할수록 보이지 않는 압력이 생긴다. 이 압력에는 더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놀라운 힘이 있다. 어디선가 흘러온 이야기와 과거 역사 속의 그럴듯한 스토리가 결합해 합리화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정보를 취합하고 검증해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고 믿지만, 사실 인간은 타인의 생각과 항간의 소문에 의존한 비합리적 판단을 하는 존재이다. 더욱이 인간은 불안, 공포, 분노와 같이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훨씬 빠르게 동화된다. "불황이 올 것이다"라는 서사의 지배하에서 불안해진 인간은 소비를 줄이고, 이로써 진짜 불황을 맞이하는 것, 바로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일 수 있다. 데이터나 수치보다 사회에 퍼진 '이야기(Narrative)'가 실제 경제현상, 즉 경제 호황이나 불황을 만든다.

인간의 뇌는 수치보다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하고 믿도록 진화해 왔다. 서사는 감정적이고 자극적이지만, 데이터는 건조하고 냉정하다. 그러니 유행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의도적으로 수치를 대입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불안을 완화하고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도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다. 여러 명의 '~카더라' 정보가 더해져 더 그럴싸한 스토리로 진화해 불안을 키울 뿐이다.

무분별한 정보가 유통하는 시대, 거짓과 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경제 체력과 지식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출처가 분명한지, 실제 증거가 있는지, 차분히 검증하는 능력과 습관을 통해 불안을 이기는 나만의 경제 데이터를 만들어보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DGIST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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