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전과 플럼북
파이낸셜뉴스
2026.05.06 18:09
수정 : 2026.05.06 19:41기사원문
보은성 낙하산 인사 또 도마에
신임 서승만 대표, 황교익 원장
문화계 격렬한 반대에도 임명
정권 잡으면 누구나 논공행상
차라리 제도화하는 건 어떤가
美인사지침 '플럼북' 참고할만
조금 오래된 이야기부터 해보자. 지금은 고인이 된 자니 윤씨 얘기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재외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윤씨를 한국관광공사 감사에 내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난리가 났다. 관광 분야 이력이 전무한 연예인 출신이라는 점, 대선 공신에 대한 노골적인 보은성 인사라는 점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정부가 코미디를 하고 있다"며 "관광산업에 대한 전문성도, 감사 직무를 수행할 능력도 없는 인물을 단지 선거를 도왔다는 이유로 임명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인사는 강행됐고, 윤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표를 낼 때까지 1년10개월간 직을 유지했다.
또 낙하산 인사가 논란이다. 이번에는 국립정동극장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다. 지난달 10일 국립정동극장 대표로 개그맨 출신 서승만씨가 선임된 데 이어, 일주일 만에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신임 원장에 임명되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낙하산 인사 파문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전문성 결여와 정치적 편향성, 그리고 그에 따른 공공적 가치 훼손이 이번에도 거론됐다. 이번 논란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진보 성향의 시민문화단체 문화연대도 이번 인사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지난달 21일 청와대 분수대 앞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문화연대는 불투명하고 일방적인 인사 관행의 즉각 중단과 문화예술 분야 인사의 명확한 기준 재정립 등을 촉구했다.
사실 낙하산 인사 논란은 뿌리가 깊다. 과거 왕들이 공신들에게 나눠줬던 공신전(功臣田)이 지금으로 치면 낙하산이다. 정권마다 시스템 인사와 탕평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무위로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정희 정권은 선후배 군인들을 공기업으로 내려보냈고, 김대중 정부 때도 낙하산이 온통 하늘을 뒤덮었다. 당선인 시절 "인사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던 노무현 대통령도 '코드 인사'라는 비판을 받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코드 인사라고 하는데, 이(낙하산) 인사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계속 잘못된 것으로 이야기하면 국정 운영이 어렵다." 어떤 이유에서든 낙하산은 정의에 어긋나는 인사 관행이지만, 너무 솔직해서 담백하기까지 한 노 대통령의 이 말을 무작정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온 게 플럼북(Plum Book)이다. 플럼북은 미국에서 운영 중인 일종의 대통령 인사지침서로, 이 책자의 표지가 자주색(Plum)인 데서 연유한다. 지난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제도화된 플럼북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직위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어떤 자리에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를 엄격하게 따져 무분별한 낙하산을 사전에 차단하는 필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하지만 '한국판 플럼북' 도입은 논의만 무성할 뿐 번번이 휴지통 속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야당일 땐 찬성하다가도 여당이 되면 침묵하기를 반복하는 정치권의 이중성 때문이다. 여기에 제왕적 인사권자의 전략적 모호성 유지 욕구도 플럼북 도입을 방해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제3권 12장에서 "최고의 플루트는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최고의 플루트는 그 악기를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게 맞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향유할 수 있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마이클 샌델은 "그것이 플루트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라면서 "정의(Justice)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플럼북은 최고의 연주자는 아니더라도, 최악의 낙하산은 가려내는 방편이 될 수 있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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