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앞에 선 5·18 기록자… "빼앗긴 이름 되찾는 일이 기록"
파이낸셜뉴스
2026.05.12 16:40
수정 : 2026.05.12 16:40기사원문
제주도민대학 북콘서트 개최
이재의 작가 '그 봄날의 기억' 강연
"제주와 광주, 침묵의 시간 닮아"
왜곡을 넘는 시민 기록의 힘 조명
교육·연구·청소년 교류 연대 제안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광주 5·18을 기록한 작가가 제주 4·3의 땅에서 "기록은 빼앗긴 이름을 되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국가폭력의 피해와 강요된 침묵을 겪은 제주와 광주가 추모를 지나 교육과 연구, 청소년 교류로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던졌다.
제주도민대학 세계시민 아카데미는 12일 오후 제주콘텐츠진흥원 BeIN 공연장에서 이재의 작가와 함께하는 북콘서트 '4월과 5월, 그 봄날의 기억들'을 열었다.
행사장은 기억의 교실이었다. 무대 화면에는 1985년 초판과 2017년 전면개정판, 해외 소개 자료가 차례로 비쳤다. 한 권의 책이 검열과 침묵의 시대를 통과해 어떻게 시민의 기록으로 남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작가는 제주를 찾는 마음부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4·3이라는 오랜 죽음과 침묵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며 "광주 5·18과 제주는 기록하면 위험했던 시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4월의 제주와 5월의 광주가 만나 아픔을 마주보고 기억을 나누는 자리"라고 의미를 짚었다.
1985년 광주의 기록을 시작한 이유도 설명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5·18을 말하고 쓰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 작가는 "5·18에 직접 참여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죄책감이 컸다"며 "그대로 두면 국가의 거짓말만 역사가 될 것 같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기록은 거창한 출판 기획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민 증언을 모으는 일에서 시작됐다. 이 작가는 당시 40~50명의 시민을 인터뷰했고, 증언자들이 모두 울었다고 전했다. 억울함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다는 말에는 침묵을 강요당한 시대의 무게가 담겼다.
그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개인 창작물이 아니라 광주 시민들의 증언이 모인 집단 기록물로 설명했다. 당시 초판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없었던 배경도 밝혔다. 광주를 말하는 것 자체가 체제 도전으로 취급됐던 시절이었다. 학생 신분이던 집필자와 함께 작업한 이들에게도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석영 작가의 이름이 책의 보호막이 됐다.
이날 강연의 핵심은 제주 4·3과 광주 5·18의 연결이었다. 이 작가는 두 사건이 시공간은 다르지만 국가폭력의 피해 경험, 강요된 침묵, 낙인찍기, 진실을 위한 오랜 싸움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명'의 문제를 강조했다. 정명은 사건에 맞는 이름을 바로 붙이는 일이다. 이 작가는 "가해 권력은 피해자의 이름을 가장 먼저 뺏고 그다음 이름을 바꾼다"며 "'폭도'나 '빨갱이'로 이름을 바꿔야 억울한 죽음이 정당한 진압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록의 의미도 이 대목에서 선명해졌다. 그는 "기록은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빼앗긴 이름을 되찾는 작업"이라며 "억울한 죽음에 다시 인간의 얼굴을 되돌려주는 일"이라고 했다. 제주 4·3도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일 때 죽음의 의미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북콘서트는 강연에만 머물지 않았다. 배우 김민재가 진행을 맡고 박영순 전남도청을 지킨 마지막 새벽방송 진행자가 특별출연했다. 고현수 제주특별자치도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 위원장과 강덕환 제주문학관 명예관장도 패널로 참여했다. 기록과 문학, 시민 기억의 의미가 한 무대에서 이어졌다.
5·18 마지막 새벽방송의 기억은 문자 기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의 현장성을 보여줬다. 누군가의 목소리, 당시의 방송, 남겨진 증언도 기록이다. 책과 문서가 사실을 붙든다면 목소리는 그 시대를 견딘 사람의 떨림을 남긴다.
제주 4·3 기록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북콘서트의 맥락과 맞닿았다. 4·3 기록은 지역의 아픈 과거에 머물지 않고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기록으로 확장되고 있다. 광주의 기록이 국내외 독자에게 번역돼 읽힌 것처럼 제주의 기록도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자료로 자리 잡았다.
이 작가는 제주와 광주의 연대도 제안했다. 그는 추모 행사에 그치지 않고 교육, 연구, 기록, 청소년 교류, 공동 출판 등 실질적인 방식으로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제주는 광주에 "기억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경험을 전하고, 광주는 제주에 "왜곡에 맞서는 일은 계속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취지다.
이번 북콘서트는 제주도민대학 세계시민 아카데미의 취지와도 맞았다. 세계시민 교육은 먼 나라의 문제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지역의 고통과 기억을 인권과 평화의 언어로 이해하고 다른 지역의 아픔과 연결하는 과정이다.
'4월과 5월, 그 봄날의 기억들'은 과거를 다시 소비하는 행사가 아니었다. 제주와 광주의 시민 기억이 오늘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를 묻는 자리였다. 기록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거짓에 맞서 다시 이름을 부르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객석에 남았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