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없는 운동장
파이낸셜뉴스
2026.05.18 18:23
수정 : 2026.05.18 18:23기사원문
신기하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한 그 풍경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아, 이게 바로 그거구나' 하고 순간 깨달았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행사 때 찾아와 제 아이를 챙기는 부모와 그러지 못하는 부모가 갈리니, 학교가 아예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아버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어서다. 형평을 맞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모두에게 똑같이 빗장을 걸었다는 게 씁쓸했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깜짝 놀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싶어 헛웃음이 날 수도 있겠지만 교육현장에서는 심각한 문제다. 요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는 아이들을 뛰게 할지 말지부터 고민한다고 한다. 달리기는 하되 등수는 매기지 않고, 줄다리기는 비기게 끝낸다. 이기고 지는 데서 누가 상처를 입을까 봐서다. 가을 소풍은 운동장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것으로 쪼그라들었고, 수학여행을 통째로 접은 학교도 있다. 이게 요즘 학교의 평균 풍경이란다.
몇 해 전 가을, 한 초등학교가 현장체험학습을 떠났다. 버스에서 내려 이동하던 중 학생 한 명이 움직이던 버스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당시 담임교사는 1심에서 유죄, 항소심에서 형은 가벼워졌지만 유죄 인정이라는 사실 자체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통상적 교육활동 중에 벌어진 사고 한 건의 형사책임을 교사 한 사람이 직을 걸고 떠안는 구조다. 이런 일을 지켜본 다른 교사들이 현장학습을 나갈 때 움츠러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몰랐겠지만 학교가 져야 할 의무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숙박형 체험학습을 한 번 떠나려면 기획부터 정산까지 수십단계의 절차가 따라붙고, 그 대부분이 교사 몫이다. 담임은 담임이면서 여행사 직원이고, 안전요원이고, 회계담당이고, 사고가 나면 피고인이다. 의무는 이렇게 늘어나는데 인력과 예산과 법적 보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교사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숙박형 체험학습을 접은 학교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왔고, 사고가 나면 형사책임을 뒤집어쓸까 두렵다는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단순히 위축되는 걸 넘어 이제는 교육현장이 공포에 얼어붙어 있는 수준이다.
도를 넘는 민원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민원들끼리도 부딪친다. 누구는 '내 아이가 걱정되니 참관하게 해달라'고 하고, 다른 쪽은 '맞벌이라 못 가니 참관을 자제해달라'고 한다. 극성 학부모들을 막는다고 해서 이 모순은 풀리지 않는다.
결국 정책이 풀어야 한다는 얘기다. 통상 교육활동 사고의 면책을 사후 처벌이 아니라 사전 예방조치 단계까지 넓히는 보완입법, 교사가 휘말린 소송을 국가나 교육청이 떠맡는 전담 대리제 등 손봐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안전 인력과 예산을 교육당국과 지자체가 함께 지는 책임 분담, 도를 넘은 민원을 학교가 아니라 교육지원청이 받아내는 완충장치도 강화돼야 한다. 이런 뉴스에 놀랐다는 건 그동안 무관심했다는 얘기가 아닐까. 공교육에서 사라진 경험들은 고스란히 각 가정과 사교육으로 옮겨가고, 그러면 격차는 더 깊어진다. 운동회와 소풍을 멈춘 건 민원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외면한 정책과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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