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빌 게이츠 회동 결실...HD현대, 테라파워에 나트륨 원자로 핵심설비 공급
파이낸셜뉴스
2026.05.21 08:54
수정 : 2026.05.21 08:54기사원문
기본 합의서 체결..."글로벌 SMR 진출 기반될 것"
[파이낸셜뉴스] HD현대가 빌 게이츠가 설립한 미국 원자력 혁신 기업 테라파워와 손잡고 글로벌 소형모듈원자로(SMR) 시장 공략을 본격화한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직접 빌 게이츠를 수차례 만나며 공들여온 전략적 파트너십이 가시적 성과로 이어졌다.
정기선-빌 게이츠, 5개월 주기 만남...SMR에 '진심'
21일 업계에 따르면 HD현대는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조선 부문 계열사인 HD현대중공업이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공급에 대한 기본 합의서(FA)'를 체결했다.
이날 체결식에는 원광식 HD현대중공업 해양에너지사업본부장, 크리스 르베크(Chris Levesque)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양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HD현대중공업은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 주기기(RES·Reactor Enclosure System) 핵심설비를 제작·공급하는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HD현대중공업의 세계 최고 수준 중후장대 설비 제조 역량과 원자력 기자재 분야 풍부한 실적이 우선협상권 확보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FA 체결은 정기선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해온 SMR 사업 전략의 결실이다. 정 회장은 2025년 3월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확장 전략적 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같은 해 8월 서울에서 빌 게이츠 회장 및 테라파워 경영진과 만나 나트륨 원자로의 공급망 확대 및 상업화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올해 1월에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빌 게이츠와 재회해 SMR 협력 가속화 방안을 논의했다.
약 5개월 주기로 빌 게이츠와 직접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정 회장이 SMR 사업을 HD현대 그룹의 미래 핵심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 회장은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직후 열린 그룹 경영전략 회의에서 "2030년 매출 100조원 달성"을 선언하며 SMR을 로보틱스·자율운항·전기추진과 함께 신성장 사업의 핵심 축으로 제시한 바 있다.
HD현대의 테라파워 협력은 단기적 사업 제휴가 아닌, 장기적 전략 투자에서 출발했다. HD현대는 2022년 11월 조선 중간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을 통해 테라파워에 3000만달러(약 440억원)를 투자하며 'SMR 동맹'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2025년 6월에는 테라파워가 모금한 6억5000만달러(약 8946억원) 규모 기금에 엔비디아 자회사 엔벤처스와 함께 추가 투자를 단행하며 전략적 파트너십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투자에 그치지 않고 실물 사업에서도 협력을 확대해왔다. HD현대중공업은 2024년 12월 테라파워로부터 원통형 원자로 용기(Reactor Vessel) 제작 계약을 수주해 현재 제작을 진행 중이다. 이 원자로 용기는 와이오밍주 케머러에 건설 중인 나트륨 실증 원전 '케머러 1호기'에 탑재된다. 테라파워는 2025년 12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주요 안전성 평가를 당초 계획보다 한 달 앞당겨 통과했고, 올해 3월 건설 허가를 취득한 뒤 4월 23일 공식 착공에 들어갔다. 2030년 연료 장전, 2031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HD현대는 이번 실증 원전에서의 성공적 수행을 발판으로 향후 상업 모델까지 사업 협력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나트륨 원자로, 현존 SMR 중 안전성·완성도 '최고'
나트륨 원자로는 테라파워가 개발한 4세대 소듐냉각고속로(SFR·Sodium-Cooled Fast Reactor)다. 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해 기존 경수로 대비 안전성이 높고, 핵폐기물 배출량을 40% 이상 줄일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현존하는 SMR 가운데 안전성과 기술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테라파워는 나트륨 원자로 발전소의 상업적 배치를 실현하기 위해 주기기 공급망 구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
양사는 지난 1년여간 나트륨 원자로의 제조 타당성, 가격 경쟁력, 인도 일정 등에 대한 공동 연구를 수행하며 이번 FA 체결의 토대를 마련했다.
원광식 HD현대중공업 해양에너지사업본부장은 "이번 합의 체결은 테라파워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글로벌 SMR 시장 진출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며 "양사의 공동 연구를 통해 나트륨 원자로 설비를 적시에 공급하고 연속 생산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CEO는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나트륨 원전 상업화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며 "HD현대의 전문성과 우수한 역량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고 경제적인 원자력 에너지를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HD현대는 같은 날 테라파워, 현대건설과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사업 협력을 위한 3자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이 협약을 통해 HD현대는 현대건설과 함께 설계·조달·시공(EPC) 수행 및 주요 기자재 공급 기반을 마련해, 향후 미국 및 글로벌 시장에서 차세대 원전 사업에 적극 대응해나갈 계획이다.
HD현대의 SMR 사업 포트폴리오는 원자로 핵심 기자재 제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올해 2월에는 미국 휴스턴에서 SMR 기술을 적용한 1만5000TEU급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 모델을 최초 공개했고, 미국선급협회(ABS)로부터 개념 설계 승인(AiP)도 받았다. 또한 한전기술과 공동개발한 해상 부유식 SMR 발전선 역시 2030년 실증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조선·해양플랜트에서 축적한 중후장대 설비 제조 역량을 원자력 발전과 선박 동력, 해상 발전까지 전방위로 확장하는 전략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Fortune Business Insight)에 따르면, 세계 원자력 시장 규모는 2025년 404억달러(약 56조원)에서 연평균 약 3% 성장해 2034년에는 526억달러(약 73조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급증과 탈탄소 기조가 맞물리면서 SMR 시장은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메타가 최근 테라파워와 원자력 에너지 공급 협력에 나선 것도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한다.
ggg@fnnews.com 강구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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