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짜리 안경만 썼을 뿐인데…'기록'이 시작됐다 ['AI 글라스' 직접 써봤더니①]
테무에서 AI 안경을 주문하니 일주일 뒤 배송이 완료됐다.
'AI 안경'을 착용한 채 지난 8일 주말 동안 서울 도심을 누볐다. 쓰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기록됐다. 수영장에서, 쇼핑몰에서, 영화관에서.
문제는 스마트 안경으로 '찍을 수 있다'는 것과 '찍어도 된다'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강공원에서 '띵동' 소리와 함께 AI 안경이 촬영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함께 수영장에서 더위를 식히는 이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그대로 찍혔다. 안경테에서 불빛이 번쩍여도 눈치를 채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은 한산한 쇼핑몰 안 에스컬레이터에서 4칸 정도 뒤에 서니 앞에 선 사람의 힙 라인이 눈 높이에 들어왔다. 안경테에선 촬영을 알리는 LED가 점멸 신호를 내고 있지만, 문제되는 건 없었다.
만약 한강공원 수영장처럼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있는 장소에서 특정 이용객의 신체를 의사에 반해 촬영할 경우 가장 먼저 검토되는 법률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다.
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은 카메라나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해 촬영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돼 있다. 촬영대상자의 동의없이 촬영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다만 수영복 차림의 사람이 영상에 찍혔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불법촬영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인의 어떤 신체 부위를 어떤 각도와 거리에서 촬영했는지, 특정 부위를 의도적으로 부각했는지 등 구체적인 촬영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쇼핑몰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선 사람의 특정 신체 부위를 겨냥하는 경우에는 위험성이 더 커진다. 특정인의 신체가 화면 중심에 들어오도록 위치를 잡고 지속적으로 촬영했다면 단순히 사람이 우연히 영상에 포함된 경우와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촬영 장비가 스마트폰인지 스마트 안경인지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현행법은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안경 형태의 카메라도 요건을 충족하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관객수 400만 고지에 오른 영화 '호프'를 보려고 찾은 영화관에서는 적용되는 법이 달라졌다. 영화 시작 전 어둠 속에서 안경테 옆 버튼을 누르니 시선과 마주한 스크린 속 영상이 그대로 담기기 시작했다.
저작권법 제104조의6은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영상저작물을 상영 중인 영화상영관 등에서 저작재산권자의 허락 없이 녹화기기로 녹화하거나 공중송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지 않고 AI 안경으로 촬영했다고 해서 예외가 되는 건 아니다. 안경에 장착된 카메라 역시 녹화기기에 해당할 수 있어 상영 중인 영화를 촬영하면 저작권법 위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보관할 목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관 내 무단 녹화가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같은 AI 안경이라도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법적 성격이 달라지는 셈이다. 일상적인 풍경을 촬영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특정인의 신체를 겨냥하면 성폭력처벌법 문제가, 영화관 스크린으로 향하면 저작권법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몰카, 도촬로 인한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CNN 방송은 남성이 낯선 여성에게 연락처를 묻는 등의 방식으로 접근해 영상을 찍고 모자이크도 없이 온라인에 올려 조회수를 늘리는 방식의 범죄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촬영을 시작하면 '점멸'하는 표시등은 쉽게 가릴 수 있어 상대는 알지 못했다. CNN은 옷을 갈아입거나 화장실을 이용하는 장면이 찍힌 사례도 있었다며 피해가 늘어나면서'변태 안경'이라는 오명까지 붙을 정도라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AI 안경을 이용한 무단 촬영 의혹이 실제 경찰 수사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지난달 데이트 상대 여성을 AI 안경으로 무단 촬영한 혐의를 받는 남성을 수사하고 있다. 이 남성은 메타 AI 글래스의 촬영 표시등을 가린 상태에서 상대 여성의 모습을 촬영한 뒤 이를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영상에 여성의 민감한 신체 부위가 포함됐을 가능성도 들여다보며 성범죄 혐의 적용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혹시 앞서 언급한 촬영 영상들 때문에 불법을 저질렀을 것이라 걱정한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엄밀히 말해 몰카나 도촬을 한 건 아니었다. 한강공원 수영장 대신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여유있게 말을 담그는 한강 수변공원을 찾아 스케치 풍경을 찍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선 가족을 상대로 모의 촬영에 나섰다.
영화관에선 영화 배급사 로고 영상만 찍었다.
불법과 합법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촬영은 수월했다.
촬영 동의를 구하기는 했지만, 피사체가 된 상대방은 자신이 언제 촬영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촬영된 영상과 사진의 화질도 나쁘지 않았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데 수긍이 가는 순간이었다.
AI 안경은 말 그대로 수영장에서도, 쇼핑몰에서도, 영화관에서도 그저 안경이었다.
[email protected] 서윤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