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한 한국화약

파이낸셜뉴스       2003.07.20 09:50   수정 : 2014.11.07 15:43기사원문



한화그룹의 모든 사무실에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사훈(社訓)이 걸려 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사훈치고는 지나치게 비장하다. 하지만 한화 임직원들에게는 이보다 피부에 와 닿는 말이 없다.

외환위기가 몰아닥친 97년 말 한화그룹이 진 빚은 자기자본의 12배였다. 대부분의 계열사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생살을 자르는 듯한 고통을 동반한 감축, 분할, 매각, 통합을 감행한 끝에 현재 한화는 두산과 함께 대표적인 기업 구조조정 성공사례로 여기저기서 인용되고 있다.

이런 인고의 노력이 한화의 ‘오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창업주인 고 현암 김종희 회장과 김승연 회장의 ‘한화식 의리 경영’이 그를 뒷받침했다.

◇‘다이너마이트 김’ 현암 김종희=한국화약은 1941년 한국 내 화약류 판매를 전담하는 회사로 설립된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가 전신이다. 창업주 연암 김종희 회장은 1945년 9월 미군정 선포에 따라 조선화약공판의 운영을 맡아 38선 이남에 산재하고 있는 31개소의 화약고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등 국내 유일의 화약 취급 기관의 중책을 맡았다.

6·25전쟁 와중에도 화약을 사수해온 김회장은 52년 6월12일 관재청에서 실시한 조선화약공판 매각 입찰에서 23억 4568만원에 낙찰, 운영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고 1952년 10월9일 화약공판을 인수·운영할 새로운 회사 법인으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한국 화약 산업사에 큰은 획을 그었다.

부산시 대창동 1가 41에 위치한 2층짜리 가옥을 본사로 해 출범한 한국화약은 자본금 5억원, 발행 주식 1만주(당시 액면가 5만원)로, 발기인은 대표취제역의 김종희를 비롯해 김종철, 유삼렬, 김덕성, 민영만, 홍용기, 권혁중 등 7인이었다.

당시 정관에 나타난 사업 내용을 보면 화약류 및 공업 약품의 제조·판매·보관·수출입, 기계 기구 및 총포류의 수리·판매·수입, 농산물·광산물·기타 공업 제품의 생산 가공·판매·수출입, 글리세린 제조·판매·수출입, 산알칼리 제조·판매·수출입, 기타 이에 부속되는 일체의 사업으로 하고 있다.

6·25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가 본격화된 55년 어느날, 현암은 강성태 상공부장관을 만난다. 강장관은 현암에게 며칠전 경무대에서 올라갔다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내용을 전해준다.

이대통령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도 화약공장이 있는데 왜 화약을 만들어 내지 못하느냐, 아직까지 일본 사람이 만든 화약을 쓰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며 하루 속히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대통령의 뜻을 전달받은 현암은 그 때부터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온 열정을 다 바쳤다. 드디어 58년 6월 인천화약공장 초화공실을 높게 에워싸고 있는 토제위로 대형 직각 삼각형의 적색 깃발을 올리면서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 시험생산은 시작됐다. 이는 한국 화약산업사에 신기원을 이룩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번째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화학산업에 본격 진출=한국화약이 PVC공업에 진출하게 된 것은 석규화학 분야로의 진출과 복합적인 연관이 있었다. 논의가 촉발된 것은 60년 초.이 때부터 한국화약 기획실은 김회장의 지시를 받아 64년 11월 나프타 분해시설을 비롯, 석유화학계열 공장을 망라한 석유화학 사업계획을 완성했다. 이를 민원서류라는 명목으로 당시 경제기획원에 접수시켰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화약의 석유화학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한국화약은 석유화학 1단계로서 PVC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그 시기는 65년 8월25일. 현암은 이날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한국화약이 처음으로 투자한 한국화성공업을 만들었다.

김회장은 회사 설립 직후 폭넓게 구상해온 석유화학사업 진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PVC공장 건설 및 제2정유공장 건설에 필요한 파트너 물색과 함께 기술 및 자금문제를 타진했다. 그 결과 65년 9월 미쓰비시상사와 PVC공장 건설에 필요한 800만달러 규모의 차관도입에 대한 가계약을 체결했다.

현암은 한국에 돌아와 PVC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승인을 정부에 신청했다. 이 또한 순탄치 않았다. 그 당시 한·일 협정 비준서가 교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관승인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여기에 기존 업체와의 마찰, 정부의 PVC사업승인 지연 등으로 인해 공장 라인을 가동하기까지는 회사 설립으로부터 3년 가까이 소요됐다.

이 시기가 창업 이후 가장 어려운 때였다. 출혈경쟁과 원료의 폭등, 여기에 경기불황까지 겹쳐 산더미처럼 쌓이는 재고로 자금회전이 어려웠다. 급기야 어음부도까지 늘어났다. 이런 어려움은 67년 시작되어 72년까지 5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지만 석유화학에 대한 현암의 강한 의지와 집념이 이를 지켜냈다.

◇민간 정유시대를 개화한 경인에너지=석유정제업은 일개 기업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장치산업이다. 또 석유 다국적 기업과의 제휴없이 정유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66년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두었던 정부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군산화력, 서울화력, 의암수력 등의 완공을 서둘렀다. 특히 정부는 채산성이 낮은 석탄보다는 석유류 등 대체 에너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66년 4월 제1정유공장인 울산정유공장의 증설과 함께 제2정유공장을 전남 여수에 설립하기로 한다.

곧이어 정부는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를 공모했다. 그 당시 재계는 제2정유공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현암은 일본에 진출해 있는 미국의 유명 석유회사들과 접촉하는 등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 신청을 했다. 그러나 칼텍스와 락희(현 LG)가 제휴한 호남정유에 밀려 쓴잔을 마시게 됐다.

현암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제3정유공장에 도전장을 낸다. 유니온오닐 합작투자에 성공한 김회장은 68년 1월 가칭 경인전력개발을 만들어 같은해 전기사업 경영허가를 따낸다. 결국 김회장은 69년 11월3일 에너지 사업을 총괄한 법인 ‘경인에너지개발주식회사’를 정식 발족한다. 이듬해 3월17일 사명을 ‘경인에너지주식회사’로 변경해 민간 정유시대의 깃발을 올렸다.

한국화약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밀폭약 및 함수폭약 국산화를 통해 우리나라 방산업체 위상을 구축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화약은 정밀화학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이어 고려씨스템산업을 설립해 전자분야에 진출했다.

또 성도증권 인수, 서울프라자호텔 운영, 태평양건설㈜ 출범 등을 통해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 sejkim@fnnews.com 김승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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