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 이병철의 삶과 열정
그 뒤 호암은 일본유학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갈 때 호암은 뱃멀미가 심해 1등석에 자리를 옮겨달라고 했으나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수모를 받으며 거절당했다. 이를 계기로 호암은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나라는 강해야 하며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호암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건강을 회복한 뒤 호암은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아버지에게 300섬에 달하는 재산을 받아 1936년 2명의 지인과 함께 경남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창업했다. 사업 첫해에 손실을 본 호암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뒤 호암만의 방식으로 정미소를 운영, 흑자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사업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호암은 이후 트럭 10대를 보유하고 있던 일본 운수회사를 인수한 뒤 사업을 번창시켰다. 트럭은 다시 20대로 늘어가며 운수업은 탄탄대로의 성공행진을 이어갔다.
호암은 이 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부동산업에 진출했다가 1937년 중일전쟁 여파로 은행 대출이 중단되면서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된다. 후일 호암은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 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고 회상했다.
모든 사업을 청산한 호암은 소자본에 맞고 수익성도 높은 무역업에 나서기로 하고 1938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 인교동에 ‘삼성상회’란 간판을 걸었다. 삼성의 ‘삼’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의미하며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때부터 호암은 인재를 아끼고 직원들을 믿는 경영철학을 보여줬다. 호암은 “의심을 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고 ‘호암자전’을 통해 경영철학을 피력했다.
1948년 호암은 잘나가던 삼성상회를 청산하고 서울로 진출했다.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 것. 당시 호암은 ‘사원주주제’를 도입, 회사 수익이 나면 지분에 따라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는 창업 1년 만에 무역업 랭킹 7위란 놀라운 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의 사업은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대구 양조장을 위탁경영하던 직원들로부터 양조장사업의 수익금을 받아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가서 삼성을 재건하게 된다.
호암의 사업정신은 이후부터 꽃을 피게 된다. 당시 무역업을 통해 1년 만에 자본금의 17배를 불린 호암은 중역회의를 소집, ‘제조업 진출’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면서 온 국민에게 설탕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제일제당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호암은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그동안 수입품이 독점했던 양복지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호암은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보국’이란 경영철학을 마침내 구현한다. 호암은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1980년대에는 기업인으로서 생애를 건 일대 모험을 시도한다. 반도체와 컴퓨터사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이다.
사업을 향한 호암의 열정은 그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는 1976년 위암 진단을 받았으나 불굴의 정신력으로 병마를 이겨내며 그 후로 10여년이나 더 생존했다. 이 기간에 호암은 삼성중공업을 창립하고 거제조선소를 지어 발전시켰으며 삼성석유화학을 만드는 등 끝없는 도전을 했다.
호암은 한국 경제 사상 초유의 수많은 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키면서 평생을 바쳤다. 위대한 기업가이자 경영구루인 호암은 1987년 11월 19일 호흡을 보조하는 고무관 장치를 거부하고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영면 이후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일본에서는 훈일등서보장을 추서했다.
/yhj@fnnews.com 윤휘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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