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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 탄생 100년 ‘호암을 기리다’] (1) 인간 이병철의 삶과 열정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1.13 14:36

수정 2010.01.13 17:25

▲ 생전의 호암 이병철이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한옥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호암은 만년에 이곳을 찾아 사업구상 등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고 한다.

2010년 2월 12일은 ‘재계의 거목’ 호암 이병철(1910년 2월 12일∼1987년 11월 19일) 삼성그룹 창업주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10년은 한일병탄으로 우리나라가 국치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던 해였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이 더욱 빛나고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듯이 1910년은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삼성이란 기업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육성해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 세기를 뛰어넘는 철학과 경영이념을 사회 각계에 전파해 우리나라가 일제침략과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움을 딛고 선진국 대열에 들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파이낸셜뉴스는 호암 이병철의 일생과 철학 및 그의 경영이념이 깃든 삼성을 조명함으로써 삼성의 성공 유전인자(DNA)는 무엇인지,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의 한국 기업들이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5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호암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중교리에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당시 배웠던 논어는 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쳐 기업 경영철학의 밑바탕이 됐다.

당시 한일병탄 이후 일제강점기란 어수선한 시기 속에서 호암은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신식학교에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호암의 부모는 호암의 뜻이 확고한 것을 알고 11세의 어린 자식을 진주 지수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시켰다. 이후 호암은 서울로 와 중동중학교 과정을 마친 뒤 1926년 12월 5일 17세의 나이로 사육신의 후손인 박두을과 결혼했다.

그 뒤 호암은 일본유학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갈 때 호암은 뱃멀미가 심해 1등석에 자리를 옮겨달라고 했으나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수모를 받으며 거절당했다. 이를 계기로 호암은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나라는 강해야 하며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호암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건강을 회복한 뒤 호암은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아버지에게 300섬에 달하는 재산을 받아 1936년 2명의 지인과 함께 경남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창업했다. 사업 첫해에 손실을 본 호암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뒤 호암만의 방식으로 정미소를 운영, 흑자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사업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호암은 이후 트럭 10대를 보유하고 있던 일본 운수회사를 인수한 뒤 사업을 번창시켰다. 트럭은 다시 20대로 늘어가며 운수업은 탄탄대로의 성공행진을 이어갔다.

호암은 이 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부동산업에 진출했다가 1937년 중일전쟁 여파로 은행 대출이 중단되면서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된다. 후일 호암은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 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고 회상했다.

모든 사업을 청산한 호암은 소자본에 맞고 수익성도 높은 무역업에 나서기로 하고 1938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 인교동에 ‘삼성상회’란 간판을 걸었다. 삼성의 ‘삼’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의미하며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때부터 호암은 인재를 아끼고 직원들을 믿는 경영철학을 보여줬다. 호암은 “의심을 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고 ‘호암자전’을 통해 경영철학을 피력했다.

1948년 호암은 잘나가던 삼성상회를 청산하고 서울로 진출했다.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 것. 당시 호암은 ‘사원주주제’를 도입, 회사 수익이 나면 지분에 따라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는 창업 1년 만에 무역업 랭킹 7위란 놀라운 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의 사업은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대구 양조장을 위탁경영하던 직원들로부터 양조장사업의 수익금을 받아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가서 삼성을 재건하게 된다.

호암의 사업정신은 이후부터 꽃을 피게 된다. 당시 무역업을 통해 1년 만에 자본금의 17배를 불린 호암은 중역회의를 소집, ‘제조업 진출’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면서 온 국민에게 설탕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제일제당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호암은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그동안 수입품이 독점했던 양복지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호암은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보국’이란 경영철학을 마침내 구현한다. 호암은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1980년대에는 기업인으로서 생애를 건 일대 모험을 시도한다. 반도체와 컴퓨터사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이다.

사업을 향한 호암의 열정은 그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는 1976년 위암 진단을 받았으나 불굴의 정신력으로 병마를 이겨내며 그 후로 10여년이나 더 생존했다. 이 기간에 호암은 삼성중공업을 창립하고 거제조선소를 지어 발전시켰으며 삼성석유화학을 만드는 등 끝없는 도전을 했다.

호암은 한국 경제 사상 초유의 수많은 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키면서 평생을 바쳤다. 위대한 기업가이자 경영구루인 호암은 1987년 11월 19일 호흡을 보조하는 고무관 장치를 거부하고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영면 이후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일본에서는 훈일등서보장을 추서했다.

/yhj@fnnews.com 윤휘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