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개화기 신건축자재 유리

파이낸셜뉴스       2013.05.26 17:39   수정 : 2013.05.26 17:39기사원문



조선시대 개화로 우리의 주거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건축자재를 꼽는다면 바로 '유리'다. 전통한옥과 도시한옥의 전통문과 한지창이 서서히 유리문으로 바뀌면서 우리 생활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유리로 된 창과 문은 채광과 환기가 좋아 실내가 밝고 깨끗함을 주어 위생적인 측면에서 가치가 있었다. 또 '신가정'이라는 개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물이 되기도 했다. 개항 이후로 부산.인천항 등의 외국인 조차지의 업무와 주거시설을 비롯해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들어서는 외교공관이나 관사, 학교, 종교시설 등이 근대식 건축구조물로 건립되면서 창문유리의 수요는 급격히 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리창이 처음으로 들어가는 건축물은 1876년 개화 이후 일본이 공사관을 지으면서부터다. 양식 건물로는 역시 1879년 지은 부산의 일본관리청 건물이다. 이 건물은 초량왜관의 우두머리가 살던 관수가(館守家)를 헐어 지은 것인데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했다. 그러나 창문유리가 본격적으로 수입이 된 시기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다. 수교국가가 늘다보니 많은 외국인이 외교사절로, 아니면 선교사 또는 여행객으로 조선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내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한옥에 살기도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서양인들에게 맞는 주거시설과 편의시설이 필요했다.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로 호텔이 들어선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니까 부산은 인천항보다 7년 전에 이미 조선의 관문이자 개항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서울의 관문은 못되었다. 인천항의 개항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배를 이용해 조선(서울)을 찾아오는 외국인은 반드시 부산항을 거쳐서 인천항으로 가야만 했다. 인천항으로 직항로가 개설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가 부산이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부산항으로 오려면 약 15~16시간이 소요되었는데 대한해협을 지날 때면 파도가 거칠어서 대부분이 힘들고 지루했다. 이렇게 피로한 몸을 이끌고 다시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서 15시간 정도를 항해해야만 겨우 인천항에 닿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배가 늦게 도착하면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 인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서양인들이 주막에서 묵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자연스럽게 근대식 숙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1884년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는 이 기회를 살려 자신의 저택을 '대불호텔(Hotel Daibutsu)'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근대식 숙박업을 운영했던 것이다. 그후 1888년에는 집 옆에 3층짜리 유리창이 있는 그리스풍의 벽돌건축물을 지어 개화기에 인천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을 맞이했던 근대화의 요람이 됐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유리 수입이 통계상으로 나타난 것은 1885년부터다. 1885년 411박스, 1886년 380박스, 1887에는 874박스, 1890년 1141박스, 1891년에는 1155박스로 수입이 급증했다. 1885년과 1886년은 전량이 인천항을 통해서 수입이 됐다.
1887년에는 96.9%, 1891년은 72.5%가 인천항을 통해 수입될 정도로 인천은 우리나라 창유리 수입의 대표적 항만이었다. 이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많은 근대화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890년대 영국공사관,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조선해관본부, 악현성당, 용산신학교, 명동성당, 정동교회 등 26개나 되는 양풍 근대화건축물을 지었는데 이들 건축물과 당시 창문유리 수입의 흐름은 무관치 않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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