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와 오디세우스, 그 운명적 만남

뉴스1       2022.10.27 12:00   수정 : 2022.10.27 13:35기사원문

국내 한 일간지에 실린 에르메스 광고. / 사진=조성관 작가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 중인 카두세우스를 들고 있는 에르메스 상. / 사진=위키피디아


오디세우스 두상. / 사진=위키피디아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모스'. 아르놀트 뷔클린의 1896년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에르메스 벽화. / 사진=위키피디아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신문을 넘기다가 맨 뒷면의 전면광고에 눈길이 멈췄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ēs) 광고다. 국내 한 대형 백화점 수도권 지점에 매장을 새롭게 연다는 내용. 핑크색 광고 디자인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중산모를 쓴 신사가 석재 아치형 문을 열고 고개를 살짝 기웃한다. 문 안쪽이 궁금하다는 몸짓이다.

순간, 내가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 동영상처럼 떠오른다. 나는 2주에 한 번씩 강남 JW메리어트 호텔에 간다. 그곳에서 내가 운영하는 문화살롱 '지니어스 테이블'이 격주로 열린다.

JW메리어트 호텔은 신세계백화점, 센트럴시티터미널과 붙어 있다. 지하철을 이용해 이 호텔로 가려면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3층이 바로 신세계백화점 명품 코너다. 에르메스, 불가리, 티파니&Co, 샤넬…. 명품 브랜드 골목을 지나면 호텔 로비와 연결된다.

강연이 끝나는 시각은 대략 오후 9시10분쯤. 그때쯤이면 명품 골목길은 대개 진열장의 불을 꺼놓아 살짝 어둑해진다. 나는 그 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지하철을 탄다.

그런데 그 시각이면 명품 골목길에 진풍경이 펼쳐지곤 한다. 1인용 텐트가 좁은 골목길 양옆에 줄지어 쳐져 있는 것이다. 후드티나 패딩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텐트에 들어가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을 본다. 매장이 열리면 먼저 입장해 상품을 구매하려는 이른바 '오픈런' 고객들이다.

한번은 말쑥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캠핑용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우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오픈런' 밤샘을 볼 때마다 갖가지 상념이 스친다.

샤넬과 에르메스는 루이뷔통과 함께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다. '샤넬'은 우리가 아는 대로 창업자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이름에서 따왔다. 더 이상의 설명이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에르메스는? 에르메스는 조금 복잡하다. 서양문화예술의 저수지인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도 나온다.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방랑을 그리는 작품. 오디세우스는 영어. 라틴어로는 율리시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남편이면서 이오니아 바다에 떠 있는 섬 이타카(Ithaca)의 왕.

오디세우스는 지적이고 명석하고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오디세우스가 처자식이 기다리는 이타카섬으로 돌아오는 10년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오디세이'다.

미디어에서는 흔히 장구한 연구나 탐험을 가리켜 'OOO 오디세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뇌과학 오디세이' 하는 식이다. 1968년에 나온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영화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왕비를 트로이로 납치한다. 스파르타의 왕은 원정 부대를 편성하며 오디세우스를 호출한다.

오디세우스는 갈등한다. 전쟁에 나가면 귀향하는 데 오래 걸린다는 신탁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원정을 피하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형 아가멤논이 동생의 상태를 증언하면서 트로이 전쟁에 나서게 된다.

이타카는 그리스 서쪽, 그러니까 아드리아해 입구에 있는 작은 섬이다. 트로이에서 이타카섬까지는 당시의 항해술로도 이삼일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뱃길이다.

그런데 왜 오디세우스는 10년이나 걸렸을까. 왜 아내 페넬로페를 10년이나 기다리게 했을까. 오디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그 자초지종은 이렇다.

트로이에서 함대를 이끌고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낯선 섬에 잠시 정박한다. 그곳은 외눈박이 거인부족 키클로페스(Kyklopes)가 살고 있는 섬.

그들 중 가장 힘이 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가 그의 부하들을 동굴에 가두고 차례대로 잡아먹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부하들을 전부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를 꾀어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폴리페모스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자 불에 달군 막대기로 펠리포모스의 눈을 찌른다. 눈이 먼 폴리페모스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자 그의 부하들은 동굴에서 탈출한다. 그 폴리페모스가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목숨을 건진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이 도착한 섬은 마녀 키르케(Kirke)가 지배하는 섬. 오디세우스는 어떤 섬인지를 알아보려 병사들로 정찰대를 꾸려 섬 안쪽으로 들여보낸다.

키르케는 병사들을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여 마법의 약초를 넣은 음식을 대접한다. 밖에서 망을 보던 병사 한 명을 제외한 음식 대접을 받은 병사 전원이 돼지로 변한다. 키르케는 돼지로 변한 병사들을 우리에 가둔 채 오디세우스를 기다린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우연히 수상한 터널을 지나며 이계(異界)로 들어간 치히로 일가족. 치히로의 부모는 시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유바바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돌변한다. 치히로는 부모를 구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마침내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출해 이계를 탈출해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디세이'에서 돼지 모티브를 차용했다.

돼지로 변하지 않은 병사가 상황을 알리면서 오디세우스는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구출하려 키르케의 성으로 가기로 한다. 그 도정에서 제우스의 사자(使者)인 '전령의 신' 에르메스를 만난다. 에르메스는 오디세우스에게 키르케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며 허브를 먹게 한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를 성으로 들어오게 해 극진하게 대접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들지 않는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위엄과 책임감에 반한다. 오디세우스는 성에 머물며 부하들을 마법에서 풀려나게 할 방법을 모색했고, 결국 부하들은 구해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르메스는 제우스의 사자이면서 신들의 전령이다. 에르메스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르메스는 오랜 세월 조각과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에르메스에게 명령하는 제우스' '아폴로와 에르메스가 있는 풍경' '아르고스를 잠재우는 에르메스'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에르메스 등.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는 여러 조각가의 에르메스 동상이 전시 중이다.

에르메스 하면 동시에 연상되는 게 카두세우스다. 뱀 두 마리가 칭칭 감고 있는 지팡이! 회화든 조각상이든 에르메스의 전신상에는 카두세우스가 바늘의 실처럼 따라다닌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벽화에도 에르메스가 등장한다. 카두세우스를 든 에르메스! 유럽의 궁전에는 거의 에르메스가 두상이나 전신상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마구(馬具) 용품을 만들며 가문의 성(姓)을 붙였다. 에르메스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승마·마차용 제품을 출시해 주목을 받는다.

에르메스의 로고는 4륜 마차다. 로고가 절묘하다. 마구용품 제조사로 출발했다는 정체성과 '전령의 신'이라는 신화 속의 이미지를 모두 살린 것이다.

명품 시계 3대 브랜드 중 하나가 '랑에 운트 죄네'다. 줄여서 보통 '랑에'로 부른다. 랑에는 2019년 브랜드 6번째 시계 컬렉션으로 오디세우스를 출시했다. 랑에 오디세우스는 스포츠 시계로 인기가 높다. 이렇듯,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들은 생각보다 훨씬 깊숙하게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에르메스가 없었더라면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아내 페넬로페를 다시 만나지 못했으리라. 나는 우연히 '에르메스 오픈런'을 목격하고 뜻하지 않게 서가에 꽂힌 '오디세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 여담(餘談) : 이타카섬의 페넬로페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오디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시달린다. 그러자 젊은 청년들의 구애가 줄을 잇는다.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믿는 페넬로페는 그때마다 말한다. 지금 짜고 있는 수의를 다 짜고 나면 그때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수의가 거의 완성될 만하면 실을 풀러 처음부터 다시 짜기 시작한다. 이렇게 짰다 풀렀다를 반복하며 아내는 10년간 남편을 기다린다.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일을 가리키는 '페넬로페의 수의 짜기'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페넬로페는 미모와 지혜와 정절의 표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가 스페인 출신의 페넬로페 크루즈다. 스페인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부인이다. 바르뎀의 멀고 먼 조상이 오디세우스였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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