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하늘 아래 핀 윤동주의 시..평화를 노래하다
파이낸셜뉴스
2025.10.18 06:00
수정 : 2025.10.18 19:53기사원문
릿쿄대에 울려 퍼진 ‘쉽게 씌여진 시’
한일을 잇는 기억과 반성의 시간
윤동주 모교 세 곳 모두 기념비 세워져
【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년 6월 3일)
비가 촉촉히 내리던 지난 11일 도쿄 릿쿄대 이케부쿠로 캠퍼스 서쪽 14호관 인근. 이 학교 이문화커뮤니케이션 학부 4학년 쿠도 시노 씨와 전지민 씨가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를 일본어와 한국어로 교대로 낭독했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의 배경이 된 릿쿄대는 이날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릿쿄대는 윤 시인이 1942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갔을 때 다녔던 첫 대학이다. 그는 이 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한 학기 다닌 뒤 교토 도시샤대로 편입했다. 도시샤대 재학 당시인 1943년 조선 독립을 논의하는 유학생 단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판결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돼 해방 반년 전인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윤 시인은 일본에서 처음 다닌 릿쿄대에서 '쉽게 씌어진 시(1942년 6월 3일)', '흰 그림자’(4월 14일)', '흐르는 거리’(5월 12일)' 등 주옥 같은 5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쉽게 씌어진 시'는 육첩방(다다미 6장을 깐 일본식 방), 학비 봉투 등의 소재를 통해 나라 잃은 학생의 설움을 담담히 그려냈다.
윤 시인의 시비나 기념비가 도쿄에 세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도시샤대가 있는 교토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도시샤대에는 1995년에 시비가 건립됐고 윤 시인의 교토 하숙집터에도 '윤동주 유혼지비'가 있다. 도시샤대 재학 시절 친구들과 소풍하며 마지막 사진을 남긴 교토 우지강 옆에는 2017년 현지 문학 팬과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돼 건립한 기념비 '기억과 화해의 비'도 있다.
연세대, 도시샤대에 이어 릿쿄대에도 시비가 세워짐에 따라 윤 시인이 다녔던 대학 세 곳에서 모두 한글로 적힌 그의 시를 볼 수 있게 됐다.
윤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제 일본에서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물리적 터전이 모두 마련됐다"고 말했다.
이들 대학이 기념비를 세우는 이유는 단지 '한 시인을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반성과 기독교적 양심, 한일 화해 ,평화 교육 등을 하나로 엮어내는 실천적 의미가 있다. 그의 죽음을 잊지 않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마주하며 그 시대의 잘못과 실패를 기억하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은 "릿쿄대 역시 학도 출정으로 학생들을 전쟁터로 보냈다.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학이 어떻게 비틀거렸는지 그 어두운 역사도 계속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책무"라고 말했다.
고하라 가쓰히로 도시샤대 학장도 "앞으로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을 것"이라며 "세 대학이 협력해 윤 시인을 기념하고 그의 뜻을 이어받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윤동주기념사업회장인 윤동섭 연세대 총장 역시 "세 대학이 순수하고 자유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윤 시인의 정신을 함께 기리는 일을 하자고 논의했다"며 "인류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윤동주 정신을 후학들이 이어나가게 앞장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릿쿄대는 윤동주 기념비 제막식을 전후해 윤 시인의 세계를 조망하는 특별 전시행사를 이달 25일까지 진행한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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