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에는 연습 없다"...폐쇄된 밀실의 아이들, 국가권력이 보호하는 선진국

파이낸셜뉴스       2025.11.29 08:00   수정 : 2025.11.29 08:00기사원문
[아동체육 해외 사례가 주는 교훈]
관장 양심에만 맡긴 한국 안전 사각
'법과 시스템'으로 감시하는 선진국
미국 등 다른 나라 '무관용' 원칙
"아이들 살릴 '제3의 감시자' 필요"



지난 5월 충북 청주의 한 합기도 체육관에서 9세 여아가 훈련 도중 척수 손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사고 직후 초기 대응 미흡과 안전 관리 부실 논란이 제기됐으나, 체육관 측은 기저질환 가능성을 주장하며 책임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본지는 국내 체육관 현실과 해외 시설 매뉴얼을 비교하고, 전문가 진단을 통해 최소한 '안전장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합기도 체육관에서 교육을 받다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지연(가명)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외의 선진적인 안전 시스템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영국과 일본 등 스포츠 선진국들은 아동 체육 활동 중 발생하는 안전사고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영국, 제3의 감시자 '복지 담당관'과 DBS


영국의 경우, 스포츠 단체에만 안전을 맡겨두지 않는다. 영국아동학대방지협회(NSPCC) 산하에 '스포츠아동보호부(CPSU)'를 별도로 설치하여, 제3의 기관이 스포츠 현장의 안전 실태를 감시하고 표준을 제시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모든 스포츠 클럽에 의무화된 '클럽 복지 담당관(Club Welfare Officer)' 제도다. 이들은 지도자가 아닌 제3의 인물로 지정되며, 아동이 코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안전에 위협을 느낄 때 언제든 신고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한다. 지도자와 학부모 사이의 유착이나 은폐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견제 장치인 셈이다.

또한 'DBS(정보 공개 및 배제 서비스 ·Disclosure and Barring Service) 체크'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동을 지도하려는 모든 코치는 이 검증을 통과해야 하는데, 단순한 범죄 경력 조회 수준이 아니다. 과거의 체포 기록이나 아동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사소한 정보까지 스크리닝하여, 부적격자는 아예 지도자 자격증 발급 단계에서 걸러진다.

미국, '세이프 스포츠 법'으로 24시간 감시


미국은 법적 강제력을 통해 아동 안전을 지킨다. 2017년 제정된 '세이프 스포츠 법(Safe Sport Authorization Act)'은 스포츠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성인에게 '신고 의무(Mandatory Reporting)'를 부과했다.

이 법에 따르면, 코치는 아동 학대나 안전사고 의심 정황을 발견하는 즉시, 늦어도 24시간 이내에 사법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만약 이를 알고도 침묵하거나 은폐할 경우, 코치 역시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된다. 관장이 사고를 숨기거나 축소하려 했다면, 미국에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는 중범죄다.

또 '2인 1조 규칙'도 엄격하다. 성인 지도자는 공개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아동과 단둘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사지나 개별 지도를 핑계로 밀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고를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다.



일본, "의사 허락 없인 도장 못 온다"


일본은 과거 유도 사고로 인한 아동 사망 사고가 잇따르자, '전일본유도연맹' 차원에서 환골탈태 수준의 대책을 마련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부 외상(머리 충격) 대응 매뉴얼'이다.

훈련 중 머리를 부딪치거나 뇌진탕 의심 증세를 보인 아동은 즉시 연습을 중단해야 하며, 의사의 '복귀 허가 소견서' 없이는 도장에 돌아올 수 없다. 지도자의 "괜찮아 보인다"는 자의적 판단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다.

아울러 초등학생 대상으로는 관절기나 조르기 등 특정 고난도 기술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다. 한국의 이번 사례처럼 9살 아이에게 특정 스트레칭이나 기술 혹은 무리가 갈 수 있는 동작을 시키는 일은 일본 유도계에서는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

독일, "가입 즉시 보험 적용"... 국가가 보증하는 안전망


독일의 사례는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의 비극을 막아주는지 잘 보여준다. 독일의 모든 스포츠 클럽(Sportverein) 회원은 가입과 동시에 주 체육회(Landessportbund)가 관장하는 스포츠 상해 보험에 자동으로 가입된다.

한국의 영세 체육관들이 비용 문제로 보험 가입을 꺼리거나 보장 한도를 낮게 설정하는 것과 달리, 독일은 공적 자금이 투입된 보험 시스템을 통해 사고 발생 시 치료비와 재활 비용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재산 상태를 걱정하며 "치료비만이라도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한국의 비극적인 상황은, 시스템이 작동하는 독일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관장 말만 믿어야"... 감시 없는 한국의 민낯


해외가 이처럼 촘촘한 '안전 시스템'으로 아이들을 지키는 동안, 한국의 현실은 사실상 오직 지도자 개인의 '양심'에만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설 체육관은 관장 1인이 운영하는 폐쇄적인 구조다. 안전 관리 책임자가 곧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내부 감시나 견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3의 감시자가 없다 보니 사고가 발생해도 관장이 "괜찮다"고 판단하면, 전문 지식이 없는 학부모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맹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도장이 가장 위험한 장소" 해외 전문가들의 제언


미국의 인권 변호사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낸시 호그스헤드-마카(Nancy Hogshead-Makar)는 "스포츠 현장에서 '자율적인 정화'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폐쇄적인 스포츠 조직은 본능적으로 아이들의 안전보다 자신들의 명성과 이익을 보호하려 한다"며 "외부의 독립적인 기관이 강제로 개입하여 감시하지 않는 한, 밀실에서의 방임과 은폐는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또 미주리 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청소년 스포츠 안전 전문가 더글라스 에이브람스(Douglas E. Abrams) 교수는 "부모의 신뢰가 아이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소년 스포츠 안전 관련 논문을 통해 "코치는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보호할 막중한 법적 의무(Duty of Care)를 지지만, 이를 개인의 양심에만 맡겨둬선 안 된다"며 "지도자가 안전 수칙을 어겼을 때 '실수'가 아닌 '범죄'로 처벌받는다는 확실한 시그널이 있어야만 현장의 관행이 바뀐다"고 역설했다.


일본의 학교 안전 전문가인 우치다 료(Ryo Uchida) 나고야대 교수는 무도(武道) 교육 현장의 특수성을 꼬집었다.

그는 "유도나 합기도 같은 무도 도장은 지도자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라며 "지도자가 '정신력'이나 '전통'을 앞세워 과학적 안전 기준을 무시할 때, 아이들은 거부할 권력을 잃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도장이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될 수 있는 이유"라고 경고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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