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의 복통의 원인은 바로 충병(蟲病)이었다
파이낸셜뉴스
2025.12.13 06:00
수정 : 2025.12.13 13:4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옛날 한 시골 마을에 가족이 있었다. 이들은 농사일을 하면서 분변을 밭에 뿌려서 거름을 만들었다.
그런데 딸 아이가 15세가 되던 해 어느 날부터 밥을 잘 먹다가도 갑자기 식욕이 없는지 밥을 멀리했다. 그러면서 흙을 집어먹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씹어 먹었다.
그러던 중 딸 아이는 갑자기 배가 비트는 듯 아팠다. 딸의 부모는 인근의 약방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게 했는데, 여러 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옛말에 두무냉통(頭無冷痛), 복무열통(腹無熱痛)이라고 했소. 배가 아픈 것은 열증은 없소. 분명 속이 냉해서 그런 것이요.” 혹은 “찬 것을 너무 많이 먹은 것 아니요?” 아니면 “체한 것이요!”라고 하면서 생강, 부자, 육계 같은 온열(溫熱)한 약이나 소화제 등의 약만을 처방했다. 그런데 통증은 더더욱 심해졌다.
가족들은 이상하다 싶어 옆마을의 명의로 소문난 의원에게 다시 진찰을 받았다. 명의가 진맥을 해 보더니 맥은 삽(澀)할 뿐 한증(寒症)의 증상은 없었다. 또한 얼굴이 황달에 걸린 것처럼 창백하면서도 약간 노란 느낌이 있었다. 얼굴에 부황(浮黃)이 난 듯했고, 몸은 말랐다.
명의는 딸에게 복통의 양상을 자세하게 물어봤다. 딸은 “갑자기 배가 심하게 꼬이듯 아프다가 금방 사라집니다. 음식을 먹고 난 뒤 혹은 빈속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 마치 누군가 장을 꼬집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명의는 “밥도 잘 못 먹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딸은 “밥은 아주 꿀처럼 맛있습니다.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이상하게 살은 안 찝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명의는 속으로 ‘이는 분명 충병(蟲病)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충병이 의심되자 다시 복진을 해 보는데 살은 빠져도 배는 불룩했다. 이는 충병이 있으면 ‘수이복대(瘦而腹大, 몸은 마르면서 배만 불룩함)’하다고 한 의서의 기록과 같았다.
또한 의서에는 뱃속에 충이 있으면 침을 많이 흘리는데, 특히 밤에 베개가 젖을 정도로 침을 흐른다고 했다. 그리고 회충이 위쪽으로 올라 상역하면 심하통을 일으키고 구역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아들은 밤에 이를 갈고 뒤척이며 꿈이 많고 잠을 자다 놀라서 깨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회충이 항문에서 꿈틀거리거나 구토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증상은 딸 아이의 증상과 대동소이했다. 명의는 가족들을 밖으로 불러내더니 “딸은 지금 충병을 앓고 있소. 아마도 뱃속에 많은 충이 있을 것이요. 사람의 배 속에는 회충(蛔), 장충, 촌충, 선충, 백충 등 아홉 종류의 충이 있는데, 그중 장충은 길이가 한 자(一尺)에 이르며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딸의 아버지가 “전에 딸이 한 자나 되는 흰 벌레를 변으로 본 적이 있소이다.”라고 했다. 딸 아이의 아버지까지 과거 증상을 거들어 주니 거의 확진이 된 것이 다름이 없었다.
명의는 즉시 장에 가서 화탑병(花榻餅) 하나를 사서 먹게 하라고 시켰다. 화탑병은 구충 용도로 만든 약떡의 일종이다. 옛날에는 구충병(驅蟲餅), 무떡[무병(蕪餅)], 갈떡[노병(蘆餅)] 등 구충효과가 있는 약재를 반죽하여 섭취하기 좋게 떡으로 만든 구충용 식품들이 있었다. 화탑병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시 비자(榧子) 두 근을 사서 가루낸 후에 좁쌀처럼 볶아 며칠 동안 계속 먹게 하였다.
가족은 집으로 가서 비자를 구해 명의가 시키는 대로 딸 아이에게 만들어 주었다. 딸 아이가 “이것은 무슨 약입니까? 제 배는 왜 아프다고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딸의 아버지는 “네가 몸이 허해서 그렇다구나. 이 볶은 열매가루를 잘 먹으면 기운도 나고 복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니 잘 먹거라.”라고 했다. 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뱃속에 충이 많다고 하면 놀랄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비자는 마치 견과류처럼 맛이 좋아 딸 아이는 거부감이 없이 잘 먹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길이 몇 자가 되는 장충이 변으로 여러 마리 나왔고, 그 마릿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딸의 복통은 이렇게 해서 사라졌고, 딸 아이는 이제는 먹는 대로 살이 찌고 건강을 회복했다.
딸의 뱃속에 충이 그렇게 많았던 것을 보고 가족들도 자신들도 충병이 있을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가족 모두 비자열매를 가루내서 환약을 만들어 먹거나 꿀이나 흑설탕 졸인 곳에 가루를 섞어서 먹었다. 이렇게 빈속에 며칠을 계속해서 먹으니 역시 회충이나 촌충처럼 생긴 것들이 모두 죽어 나왔다.
옛날에는 이처럼 어린아이들에게 충병이 많았는데, 비자가 약이었다. 비자는 비자나무의 열매로 <동의보감>에는 ‘비자는 맛이 달고 독이 없으며 삼충(三蟲)과 귀주(鬼疰, 소아의 만성적인 충병)를 없애고 곡식을 소화시킨다. 뱃속에 촌백충이 있는 사람은 하루에 환약으로 만들어 7알씩 7일 동안 먹으면 충이 다 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비자유(榧子油)에는 다양한 세스퀴테르펜과 모노테르펜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기생충의 신경계를 마비시키거나(신경독성), 막 투과성을 교란해 살충 효과를 낸다. 그리고 비자열매 속의 올레산, 리놀레산은 장내 기생충의 큐티클(cuticle, 외막)을 손상시키는 작용이 보고되어 있고, 비자의 페놀류가 기생충의 단백질 변성을 유도해 구조적 손상을 일으킨다는 연구도 있다.
과거에 구충제로 쓰던 약들은 대부분이 맵고 쓴 약들이 대부분인데, 비자는 맛이 달면서도 구충효과가 있었다. 사군자나무의 열매인 사군자(使君子) 또한 맛이 달아서 아이들의 구충제로 많이 사용되었다. 비자는 주로 촌백충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컸고, 사군자는 회충을 제거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옛날에는 어린아이들에게 기생충이 많았는데, 맨발, 흙바닥, 우물물, 인분비료가 일상이어서 충란이 아이들의 손과 음식을 통해서 쉽게 위장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아이들은 영양도 부족하고 면역도 약해 몸속에 들어온 기생충이 자리 잡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밥을 잘 먹어도 살이 찌지 않으면 항상 충병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때 비자나 사군자는 과거 어린아이들의 구충제였던 것이다.
요즘도 생채소 등에 충란이 붙어 있을 수 있다. 생채소의 충란 제거의 핵심은 흐르는 물에서 충분히 문지르며 씻어주는 것이다. 소금물이나 식초물을 더하면 효과가 올라가고, 데치면 거의 완전히 제거된다. 특히 상추나 깻잎, 배추 같은 잎채소는 잎과 잎 사이, 줄기 관절 부분이 충란이 가장 많이 붙는 자리이기 때문에 단순히 물에 담그는 것보다 손으로 펼치고 문질러 씻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도 현대 한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구충제를 정기적으로 먹을 필요는 없지만, 반려동물 접촉, 흙이나 자연의 접촉이 많거나 증상이 의심될 때는 1년에 1회 정도 복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허씨의안(許氏醫案)>京畿道, 胡岱青, 小姐年及笄時, 腹痛如絞, 時醫均以受寒, 重用薑附肉桂, 其疼逾甚. 延余診視, 脈澀無寒症, 因言人腹中有蛔, 長, 寸, 線白等蟲九種, 長蟲長一尺, 不治. 胡公言:曾便過尺長白蟲. 余囑即買花榻餅一個, 令服. 再買榧子二斤, 炒如粟子, 令吃數日, 便出長白蟲數尺, 長無算, 遂愈.(경기도의 호대청 아가씨가 나이 계기에 이르렀을 때, 배가 비트는 듯 아팠다. 그때의 여러 의사들은 모두 찬 기운을 받은 것이라 하여, 생강·부자·육계 같은 온열약을 많이 썼으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내가 가서 진찰하니, 맥이 삽할 뿐 한증이 없었기에, 사람의 배 속에는 회충, 긴 벌레, 촌충, 선충, 백충 등 아홉 종류의 벌레가 있으니, 그중 ‘긴 벌레’는 길이가 한 자에 이르며,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호공이 말하기를, ‘전에 한 자나 되는 흰 벌레를 변으로 본 적이 있다’ 하였다. 나는 즉시 화탑병 하나를 사서 먹게 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다시 비자 두 근을 사서, 좁쌀처럼 볶아 며칠 동안 계속 먹게 하였다. 그러자 길이 몇 자가 되는 긴 흰 벌레가 변으로 여러 마리 나왔고, 그 길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렇게 하고서 병이 나았다.)
<본초강목>凡殺蟲藥, 多是苦辛, 惟使君子·榧子, 甘而殺蟲, 亦異也. 但使君子, 專殺蛔蟲; 榧子, 專殺寸白蟲耳.(살충약은 대부분 고신한데, 사군자와 비자만은 감하면서 살충하는 점이 다르다. 다만 사군자는 회충을 주로 죽이고 비자는 촌백충을 주로 죽인다.)
<실험단방>○ 榧子限三升去殻, 略用去內皮, 更細作末, 調蜜作丸梧子大, 月初旬前, 初始服. 每朝空心七八丸式, 盡服, 去根神效. (비자나무열매 3되까지를 겉껍질을 제거하고 속껍질도 대략 없앤 것을 다시 곱게 가루 낸 후 꿀에 개어 벽오동씨 크기의 환을 만들어 달의 초순 전에 처음으로 복용한다. 매일 아침에 빈속에 7-8환씩을 복용하는데 다 복용하면 회충을 뿌리까지 제거하는 신묘한 효험이 있다.)
○ 榧子半斤, 去殻作末. 黑糖四五片, 濃煎, 調榧末, 空腸食數朝, 則盡死出. 月旬內服, 必效. (비자나무 열매 반근의 껍질을 제거하고 가루 낸다. 흑설탕 4-5조각을 진하게 달인 것에 앞의 비자가루를 섞어 빈속에 며칠을 먹으면 촌충이 모두 죽어 나온다. 한 달 동안 복용하면 반드시 효과를 본다.)
<동의보감>榧子. 性平, 味甘, 無毒. 主五痔. 去三蟲鬼疰, 消穀. 一名玉榧, 土人呼爲赤果. 去皮, 取中仁食之. 患寸白蟲, 日食七枚, 七日, 其蟲皆化爲水. (비자. 성질이 평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오치에 주로 쓴다. 삼충과 귀주를 없애고 곡식을 소화시킨다. 옥비라고도 하는데, 원주민들은 적과라고 부른다. 껍질을 벗기고 씨를 먹는다. 속에 촌백충이 있는 사람은 하루에 7알씩 7일 동안 먹으면 충이 다 녹는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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