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 합의는 멈췄는데, 한국은 '선택의 시간' 임박
파이낸셜뉴스
2025.12.13 06:00
수정 : 2025.12.13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국제사회의 결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됐으나, 결과는 또 한 번의 미완에 그쳤다. 2035년 이후 감축 목표 상향, 화석연료 퇴출 문구 강화, 기후재원 확대라는 핵심 의제는 선언적 문장만 남긴 채 구체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국제사회는 '기후 행동의 속도가 과학의 경고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각국은 기존 입장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
문제는 이 같은 COP 합의 실패가 한국에 결코 ‘외교적 변수’로만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 규범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축 책임과 비용이 각국 내부로 이전되면서, 한국 정부는 더 많은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선진국-개도국, 되풀이된 책임 공방
지난달 10일(현지시간)부터 21일까지 브라질 아마존의 관문 도시 벨렘에 전 세계 190개국 대표단이 모였지만 기후 위기를 늦출 결정적인 합의는 끝내 도출되지 못했다. COP30는 산림 파괴 중단 로드맵과 화석연료 단계적 퇴출(phase-out) 계획이라는 핵심 의제를 비껴간 채 막을 내렸다. 결국 최종 합의는 온실가스 감축 경로를 구체화하지 못한 채 부분적 타협으로 귀결됐다.
COP30 협상의 출발점은 여전히 ‘책임’이었다. 선진국은 중국·인도 등 신흥국의 배출 비중을 문제 삼았고, 개도국은 누적배출 책임을 앞세웠다. 전 세계 연간 온실가스 배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 역시 “선진국과 동일한 감축 의무를 지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문제는 이 갈등이 단순한 원칙 논쟁을 넘어, 구체적 수치와 의무 설정 단계에서 협상을 완전히 멈춰 세웠다는 점이다.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BDR)’ 원칙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감축 목표의 상향과 속도, 법적 구속력 문제는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COP30의 핵심 과제는 2035년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상향에 대한 국제적 가이드라인 제시였다. 과학자들은 현행 NDC로는 1.5도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해왔다. 그럼에도 다수 국가는 국내 정치와 산업 구조를 이유로 강제적 합의에 선을 그었다.
에너지 가격 불안, 인플레이션, 산업 경쟁력 저하 우려가 겹치면서 각국 정부는 기후 목표 상향을 ‘정치적 부담’으로 인식했다. 그 결과 최종 합의문에는 '각국의 여건을 고려한 자발적 상향 노력'이라는 문구만 남았다. 기후 행동의 방향성은 확인했지만, 전 세계 배출 경로를 실질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장치는 빠진 셈이다.
합의는 멈췄는데, 한국은 실행 노력 지속
COP30이 실패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2035 NDC상향에 대한 명확한 국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 합의가 느슨해졌다고 해서 한국의 감축 압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반대 상황을 맞이했다. 한국은 이미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감축이라는 목표를 국제사회에 공표했고,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외교적 신뢰와 산업 경쟁력 모두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 구조상 제조업·발전 부문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조선 등 주력 산업은 에너지 다소비형 구조를 갖고 있으며, 감축 여력이 제한적인 상태에서 목표만 먼저 설정된 상황이다. COP 합의 실패로 국제적 ‘완충지대’가 사라질수록, 한국은 더 빠른 속도로 내부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COP30에서 화석연료 퇴출 문구가 한층 모호해진 점은 한국에 복합적인 부담을 안긴다. 국제적으로는 퇴출 경로가 불분명해졌지만, 국내적으로는 석탄·가스 발전 축소가 이미 정책 목표로 설정돼 있다. 우리정부는 지난달 17일 ‘탈석탄동맹(PPCA)'가입을 선언하고 2040년까지 석탄발전 폐쇄를 선언했다.
석탄발전이라는 발전원이 폐쇄되는 만큼 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수지만, 한국의 지리·계통 여건상 단기간에 전력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원전은 안정적 전원으로 남아 있지만, 사회적 갈등과 정책 불확실성이 상존한다. 국제 합의가 명확했다면 전환 비용을 분산할 수 있었겠지만, COP의 모호한 결론은 한국에 '스스로 해답을 찾으라'는 신호로 작용하고 있다.
기후재원 논의의 실패는 한국에 특히 불리하다. 한국은 전통적 의미의 ‘선진국’이자 동시에 감축 비용이 큰 제조업 국가다. 그러나 COP30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재원 합의가 무산되면서, 글로벌 감축 비용 분담 구조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로 남았다.
이는 한국 기업에 두 가지 부담을 동시에 안긴다. 하나는 국내 규제 강화로 인한 비용 증가, 다른 하나는 국제 공급망에서의 탄소 규제 리스크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글로벌 기업의 공급망 탈탄소 요구는 국제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작동하고 있다. COP 합의 실패는 이러한 규제가 개별적으로 진행될 것을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기다릴 것인가, 설계할 것인가
COP30에서의 합의 실패는 한국에 불리한 환경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선택의 주도권을 국내로 돌려놓았다. 국제 기준이 사라진 자리를 국내 전략이 채우지 못한다면, 그 공백은 시장과 규제가 대신 채우게 된다. 이제 한국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국제 합의를 기다리며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인정한 뒤 스스로 설계할 것인지'이다.
국제합의를 기다리는 선택을 할 경우 COP 체제가 다시 작동할 때까지 현행 목표를 유지하되, 속도 조절과 유연한 해석으로 시간을 벌게 된다. 일부에서는 '국제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만 앞서갈 이유는 없다'는 논리도 제기한다. 국제 합의가 느슨해질수록 각국은 자국 규범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글로벌 기업의 공급망 탈탄소 요구는 이미 현실이다. 시간을 벌려는 전략은 오히려 산업 경쟁력 상실과 통상 리스크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가장 유력한 방식은 국제사회에 공표한 감축 목표는 유지하되, 이행 경로를 보다 현실적으로 재설계하는 방식이다. 이는 감축 자체를 미루는 것이 아니라, 산업·전력·재정의 충격을 분산시키는 전략에 가깝다.
구체적으로는 부문별 감축 목표의 재조정, 전력 믹스에서의 유연성 확대, 기술 기반 감축 수단의 적극 활용이 포함된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지속하되 계통·입지 제약을 감안하고, 원전과 가스의 역할을 ‘과도기적 안정 전원’으로 명확히 정의하는 방식이다. 선택지는 정치적 부담은 크지만, 산업 붕괴와 에너지 불안을 동시에 피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 평가된다. 에너지믹스에 대한 명확한 선언을 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재생에너지는 장기적 필수 전원이라는 점에서 방향성은 분명하지만, 단기간 대체는 어렵다. 원전은 안정적 전원으로 기능하지만, 사회적 수용성과 정책 일관성이 관건이다. 가스는 감축 목표와 충돌하지만, 전환기의 현실적 완충 역할을 한다. 정부가 이 세 전원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할 경우, 정책은 매번 갈등에 발목 잡힐 수밖에 없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기후 전환은 더 이상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산업, 에너지, 재정, 정치가 동시에 움직이는 국가 전략의 영역"이라며 "COP는 멈췄지만 한국 스스로 선택을 해하는 시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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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