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 위에 쌓인 시간"... 학고재, 지근욱 '금속의 날개' 展

파이낸셜뉴스       2026.04.16 14:59   수정 : 2026.04.16 15:02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금속은 단단하고 차갑다. 그러나 그 표면에 시간과 행위가 반복적으로 축적될 때, 더 이상 고정된 물질이 아닌 '움직이는 감각'으로 변한다. 선을 긋는 단순한 행위가 화면 위에서 시간의 층위로 확장되는 순간, 회화는 이미지가 아닌 경험이 된다.



마치 금속판에 그린 것처럼 캔버스 위에 색연필을 수천 번 그어 기하학적 무늬로 우주의 질서를 표현한 전시가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열린다. 학고재 갤러리는 무한한 우주를 표현하는 작가 지근욱(41)의 개인전 '금속의 날개'를 다음달 9일까지 개최한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23년 이후 학고재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개인전으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온 작가의 작업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988년 개관한 학고재는 한국 현대미술을 기반으로 전통과 동시대를 연결해온 대표적인 화랑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실험적 작업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특히 한옥 구조의 전시 공간은 작품과 공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며, 이번 전시에서도 중요한 감각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번 전시에서 지 작가는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닌 '어떻게 드러나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한다. 선을 긋고 물질을 쌓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재현 중심의 회화에서 벗어나 행위 자체가 만들어내는 존재 방식에 주목한다. 화면은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의 장으로 확장된다.

전시의 핵심 개념은 '시간성'이다. 지 작가는 선 긋기라는 수행적 행위 속에 내재된 비선형적 시간 구조를 드러낸다. 시작과 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과정 속에서 서로 다른 시간들이 한 화면에 중첩돼 공존한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단일한 흐름이 아닌 복합적인 층위로 얽혀 있는 '아나크로니즘적' 감각을 형성한다.

이러한 시간의 층위는 '금속'이라는 물질을 통해 구체화된다. 금속은 단순한 재료를 넘어 압축된 시간의 결정체로 기능한다. 빛과 결합한 금속성 표면은 시선의 고정을 허용하지 않으며, 관람객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깊이와 질감을 드러낸다. 그 결과 화면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는 시각적 사건으로 전환된다.

작업 방식 역시 이러한 개념을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그는 일정한 간격과 압력으로 선을 반복해 그리며 화면을 채우고, 그 위에 안료를 층층이 쌓아 올린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떨림과 오차는 기계적인 질서를 해체하고, 표면에 독특한 질감과 융기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형성된 화면은 시간의 밀도가 응축된 '물질적 장'으로 작동한다.

특히 금속성 재료가 더해진 작품들은 빛의 변화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보여준다. 정면에서는 균질한 면으로 보이던 화면이 측면에서는 선의 결을 드러내며 강하게 반사된다.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정지된 상태로 감상하는 것이 아닌 이동하며 변화하는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전시 공간 구성 또한 이러한 경험을 강화한다. 작품들은 일정한 거리와 방향성을 갖고 배치돼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개별 작품들이 모여 마치 비행 궤적과 같은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는 전시 제목인 '금속의 날개'가 상징하는 확장과 이동의 개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한 방식이다.

'날개'는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물질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운동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견고한 금속이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점차 비물질적 감각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물질과 정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궤적으로 읽힌다.

한옥 구조의 전시장과 금속성 회화가 만들어내는 대비도 주목할 지점이다. 자연광이 스며들며 서서히 변화하는 공간의 시간성과 금속 표면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속성이 한 공간 안에서 교차한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감각이 충돌 없이 공존하며, 독특한 시공간적 긴장을 형성한다.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는 회화를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생성되는 상태'로 제안한다. 물질과 행위, 시간과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결과물을 벗어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이를 반영한 전시 대표작은 '스페이스 엔진' 연작이다. 캔버스에 밑 작업을 하고, 자외선 프린터를 이용해 그러데이션을 만든 뒤 그 위에 자와 색연필을 이용해 반복적인 선 긋기로 화면을 채운 작품들이다. 밑 작업을 할 때 스테인리스 성분의 안료를 사용해 금속 느낌을 냈다.

특히 총 24개 회화로 구성된 '금속의 장(metallic field)'은 같은 크기의 사각형 두 개를 위아래로 배치한 뒤 이런 구조를 12쌍 가로로 이어 붙여 눈길을 끈다.

5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금속의 길(metallic paths)'은 11시에서 5시 방향의 사선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 위에 우상향하는 흰색 호가 이어져 있는데, 마치 우주에서 둥근 지구를 바라보는 듯하다.

지 작가는 "이번 전시는 영혼이 상승하는 이미지를 표현해봤다"며 "관람객들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고 처음과 끝도 없는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지 작가는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 예술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아트&사이언스 석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로 돌아와 회화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성곡미술관, 쉐마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했고, 지난 202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 신진트랙, 2024년 성곡미술관 오픈콜 등에 선정됐다. 현재 숙명여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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