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되는 강대국들의 핵 경쟁

파이낸셜뉴스       2025.11.03 18:05   수정 : 2025.11.03 18:31기사원문

지난 1983년은 당시 냉전 기간 중에서 긴장이 아주 높았던 해 중 하나였다.

그해 9월 대한항공 점보 여객기가 사할린섬 부근에서 옛소련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11월 미국에서 1억명 이상이 시청한 ABC 방송의 핵전쟁 영화 '그날 이후(The Day After)'는 충격과 불안에 빠지게 만들었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SS-20에 맞서 유럽에서 6~8분에 소련 영토로 보낼 수 있는 신형 퍼싱II와 순항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하기로 하자, 소련 협상단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다.

놀라운 것은 9월에 하마터면 미국과 소련이 실제로 핵전쟁에 빠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 생긴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었다.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가 지휘소 시뮬레이션 훈련인 '에비블 아처(Able Archer)'를 하고 있었는데, 나토군 동태를 주시하던 소련의 조기경보 체계는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4기를 발사한 것으로 파악했다.

소련 대공 방위군 장교가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린 결과, 실제로 미국의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는 오보로 판단하면서 아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소련이 실제로 미국의 핵 미사일이 자국 영토로 날아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미국과 나토 국가들에 핵 미사일로 반격을 했더라면 전면 핵전쟁과 함께 지구는 약 200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변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가 방영되기 1개월여 전에 미리 본 레이건 대통령은 일기장에 이 영화가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었으며, 핵전쟁 정책에 대한 마음을 고치는 계기가 됐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이 영화는 개혁과 개방에 들어간 소련에서도 방송됐고,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사거리가 500㎞에서 길게는 5000㎞인 지상발사 미사일을 금지하는 INF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소련을 이어받은 러시아와 미국이 핵무기를 놓고 다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4주년이 다가오는 가운데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달 26일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신형 핵추진 대륙간순항미사일 '부레베스트니크' 실험 성공을 발표했다.

약 15시간 동안 1만4000㎞를 날아갔다는 이 미사일을 통해 미국과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미사일을 제공하려는 움직임에 경고를 보낸 것으로 분석됐다.

이어 지난달 2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첨단 수중 무인기(드론) '포세이돈' 실험에 성공했다며 핵전력을 과시했다.

그러자 다음 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년 넘게 중단해온 핵실험을 재개하도록 미국 국방부에 지시하면서 핵보유 강대국들의 힘 겨루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세계가 핵문제에 있어서 북한과 이란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사이에 핵 보유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 여기에 중국의 경쟁이 다시 재개될 조짐이다.

이 같은 핵 강대국들의 최근 움직임이 다시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군비 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8개국은 탐지를 피하면서 더 빠르고 멀리, 정확하게 날아가는 핵무기 개발에 유례없는 비용을 투입하고 있다.


핵무기 보유국 중 올해 러시아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이 분쟁을 치렀거나 진행 중이다.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종말시계(Doomsday Clock)가 올해 어느 때보다 더 자정에 가까워지면서 세계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년 2월 만료되는 미·러 신전략무기감축조약(뉴스타트)의 연장 협상이 꼭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jjyoon@fnnews.com 윤재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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