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차기 한은총재 ‘시장과 소통’ 기대

박승덕 기자
파이낸셜뉴스
[차장칼럼] 차기 한은총재 ‘시장과 소통’ 기대

10여년 전 우리 아들 이야기다. 그 녀석은 태어나서 1년 가까이 엄마 젖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는 젖을 떼기 위해 묘안을 생각했다. 젖꼭지에 시큼한 레몬을 바르는 것이었다. 때만 되면 엄마품을 찾던 아이는 갑자기 씁쓰레함을 느꼈던지 더 이상 엄마 젖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분유수유가 시작됐다. 수개월이 지났을까. 아내는 이제 이유식을 할 때라고 했다. 분유 젖병을 떼야 했다. 끼니때만 되면 분유 젖병을 찾는 아이를 포기시키기 위한 묘수가 궁금했다. 아내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젖병 꼭지를 가위로 잘랐다. 그러자 아이는 한참을 울더니 젖병에서 멀어졌다. 신기한 것은 그 이후 한 번도 분유 젖병을 찾지 않았고 이유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충격)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살면서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를 만난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한순간에 깨지는 트라우마도 있다. 지난해 4∼5월이었다. 당시 정부와 한국은행은 금리인하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정부는 금리를 내려 내수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정치권까지 가세해 금리인하를 압박했다.

그러나 한은 총재는 내릴 만큼 내렸다는 판단이었다. 그래도 얼마 동안 김중수 한은 총재는 꿋꿋했다. 지난해 5월 초 아시아개발은행(ADB) 회의 참석차 인도를 방문했을 때 김 총재는 기자들과 만나 속내를 털어놨다. 핵심은 지난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하한 것은 굉장히 큰 것이었다고. 그래서 금리를 더 이상 내릴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믿음이 갔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1주일도 안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 전격 인하라는 결정이 나왔다. 금융시장은 아연실색했다. 기자 또한 놀랐다. 김 총재의 언행불일치로 한은에 대한 불신의 트라우마가 생긴 순간이었다.

통화신용정책(통화·환율·물가·기준금리)의 수립과 집행을 수행하는 한은은 예측가능성이 생명이다. 특히 한은 총재의 입을 통해서다. 따라서 계산되지 않은 말을 공식 자리에서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자체로 총재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최근 이주열 한은 차기 총재 후보자가 결정됐다. 한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그의 일성은 시장과의 소통이었다. 잃어버린 시장의 신뢰를 되찾겠다는 의지다. 시장과의 '불통'을 해소하고 부디 시장과 소통하는 한은 총재가 되길 소원한다.

이 후보자의 또 다른 숙제는 한은의 독립성이다. 한은은 정부 조직에서 독립된 무자본특수법인이다. 통화신용정책 수립 과정에서 자율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이 후보자는 외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매파' '비둘기파'를 떠나 확실한 명분(경제상황 분석·판단)을 통해 통화신용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2중대'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최근 3년간 파격 인사에서 비롯된 흐트러진 조직도 추슬러야 한다. 조직원을 아끼고 활력을 불어넣어줄 고차 방정식을 내놔야 한다.

부총재를 끝으로 지난 2012년 한은을 떠날 당시 그는 "개혁의 흐름에 적잖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밝힌 바 있어 더 주목된다.

어린아이나 어른뿐만 아니라 조직도 지우지 못하거나 극복해야 할 트라우마가 있다. 차기 한은 총재가 한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리더십을 보여주길 많은 사람이 고대하고 있다.

sdpark@fnnews.com 박승덕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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