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민주주의, 부끄럽지 않습니까?" 올공의 2030, 빨강도 파랑도 아니었다 [허술한 공정 때린 '예민한 공정']
(上) '절차의 불공정' MZ들의 분노
"진영 상관없이 주권침해에 입 다무는 기성세대 향한 외침"
기성세대 "'어리다'는 편견 깨…이들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파이낸셜뉴스] 태극기는 있었지만 성조기는 없었다. '재선거'를 외치는 함성은 있었지만 '부정선거'는 없었다.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무능이 초래한 '투표지 부족 사태'로 지난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소였던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은 순식간에 재선거 요구 시위 현장으로 탈바꿈했다.
경기장 앞을 가득 메운 시민들 사이로 "정치 시위가 아니다", "선동당하지 말라"는 문구가 경기장 외벽 곳곳에 붙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재선거를 외치는 이 공간의 중심엔 흔히 '정치 무관심 세대'로 불려온 2030 청년들이 있었다.
시위에 참여한 청년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재선거'라는 단일 구호만 외쳤다. 극우 진영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부정선거'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극우단체를 상징해 온 성조기는 빼고 태극기만 흔들자는 벽보도 붙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직장인들이 출근해야 하는 월요일을 앞두고 대학생들이 "직장인 대신 우리가 공간을 지켜야 한다"며 시위 참여를 서로 독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번 사태에 청년들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 각자의 목소리를 냈다.
고려대생 박진수씨(23)는 최근 '투표지가 멈춰 선 곳에서, 공권력은 누구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가'라는 제목으로 선관위와 경찰의 현장 대응을 비판하는 웹자보(웹+대자보)를 게시했다. 그리고 대자보를 올리게 된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불공평에서 시작됐다. 불합리에 목소리를 내고 국민의 권리를 확보했던 민주화 정신을 통해 대학생,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번 사태는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 침해 사안이라 좌우를 가릴 것 없이 국민 모두가 목소리를 내야하는 상황임에도,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며 선한 영향력을 떠들어 댔던 사람들이 정작 진영 논리를 초월한 국민주권침해에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선택적 민주주의로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부터 끝없이 제기돼왔던 선관위를 둘러싼 모든 논란이 21세기에 태어난 저로서는 융통성이라는 말로 넘어가기 어렵다"며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으나 누가 당선됐든 재선거가 반드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건국대 25학번이라 밝힌 강혜령씨는 '선관위 향한 정당한 불신을 이용한 극우 준동에 반대하는 건국대인'이라는 제목으로 학우들의 서명을 받았다.
강씨는 "6·3 지방선거에서 투표 용지 부족은 선관위의 어처구니없는 과실임이 분명하다. 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선관위에 분노를 표했다"고 단언한 뒤 "그러나 선거 관리 부실이 곧 부정선거는 아니다. 부정선거는 선거 결과를 바꾸려는 의도적 범죄"라며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쪽과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선관위의 충격적인 선거 관리 부실이 내란 옹호 극우 세력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빌미를 줬다. '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선관위의 선거 관리 부실에 대한 불만을 교활하게 이용하는 이들을 반대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청년 개인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대학도 연대에 나섰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서강대·한국외대 등 18개 대학 총학생회는 6·10 민주항쟁 39주년인 지난 10일 오후 일제히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부정선거·비상계엄 옹호에 매몰되지 않고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재발방지책 마련이라는 사안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이날 발표된 시국선언문에는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언급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명분이 분명히 담겼다.
동시에 이번 사태를 음모론적인 '부정선거'가 아닌 현장 대처가 미흡했던 '부실선거'로 명백히 규정했다. 선관위의 행정 실패를 꼬집으며 '관계자 징계'와 '재발 방지 대책'이라는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요구한 것이다.
이날 저녁 연대 캠퍼스에서 만난 안수진씨(22)도 "투표함에 메시지를 적었다. 내란세력의 청산과 함께 필요한 건 정치권의 절차적 정당성이라고 썼다"고 강조했다.
눈길을 끄는 건 이들의 목소리가 조직화되는 과정도 기성세대의 문법과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다. 전국 주요 대학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시국선언의 발원지는 학교 광장이 아닌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타)'이었다.
"내 투표권이 선관위 무능으로 증발했다", "선거 당일에 투표지가 모자란다는 게 말이 되냐"는 공분이 에타 게시판을 달구자, 대학생들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과거 학내 벽면에 붙이던 대자보가 '에타'에 시국선언 게시글로 올라왔다.
실명 혹은 익명으로 하나, 둘 올라오던 시국선언은 인스타그램과 X(옛 트위터),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순식간에 확산했다.
이들의 '외침'은 기득권층이 된 기성세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가볍게 여기던 2030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도 생겼다.
대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 두 딸을 키우는 주부 강연수씨(52)는 최근 관련 뉴스를 보고 큰 딸이 걱정됐다. 그는 "혹시나 딸이 올림픽공원에 갈까 걱정돼 지난 주말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눴다"며 "처음에는 내 생각이 맞다 싶었는데 딸과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딸은 강씨에게 "기성세대가 아무렇지 않게 편법으로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걸 뉴스로 많이 봤다. 우리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투표권뿐인데, 그걸 빼앗겼다는 데 나와 친구들 모두 공감했다"며 "특히 우리를 화나게 한 건 투표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어른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강씨는 "딸이 '부정선거'를 외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며 "그때부터 뉴스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이처럼 2030의 적극적인 이번 시위 참여는 기성세대의 편견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무엇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 과몰입 계층이 아닌 2030 청년세대가 이번 사태에 '목소리'를 높인 데 주목했다.
익명을 요구한 직장인 한모씨(46)는 "정치에 무관심한 줄 알았던 요즘 애들이 우리보다 훨씬 이성적이라는 점에 놀랐다. 특히 특정 정당을 무조건 욕하는 게 아니라, 행정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앞서 탄핵 시위 때도 그렇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목소리를 내는 모습에 어른으로서 많은 생각이 든다"며 청년들을 '정치 무관심층'으로 바라보던 자신의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서구 거주 김진선씨(40)도 "투표용지 부족으로 문제는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큰 이슈고, 공개적인 소리를 내는 모습이 바람직하다"며 "특히 대학생들이 나서서 움직이는 게 놀랍고 기특하다. 아직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죽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또 "뭐가 됐든 젊은 층이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건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며 놀라움을 전했다.
bng@fnnews.com 김희선 서윤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