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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입체진단 5] 은행도 명동 도 얼어붙었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06.28 04:42

수정 2014.11.07 14:09


C그룹 8층 사무실.이 회사 자금담당 이사 K씨가 근무하는 곳이다.K씨는 사무실이 떠나갈 것 같은 목소리로 부하직원을 닥달하고 있다.그만큼 자금 사정이 어렵기 때문이다.K씨는 목 뒤가 뻐근해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이달말 돌아올 기업어음(CP) 600억원의 상환을 생각하면 그 좋던 밥맛도 모래알 씹는 기분이다.

K씨는 현재 상황이 자신이 수습할 단계를 넘었다고 판단,오너에게 보고했다. 당좌대월을 한도액까지 가동해도 200억원 정도가 모자라기 때문이다.채권 신용 등급이 BBB이하인 탓에 10조원 규모로 조성된 ‘기관전용 자산유동화채권(ABS) 회사채 펀드’에 편입하기도 여의치 않다.이 때문에 오너는 주거래 은행 총재와 스케줄을 잡느라 백방으로 뛰고 있다.물론 은행총재는 바쁘다는 이유로 오너를 만나주지 않고 있다.

투신사들도 C사를 천덕꾸러기로 취급한다.투신사들은 최근 들어 C사의 CP를 1주일 단위로 차환해 주고 있다.K씨의 유일한 바람은 잔인한 6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사채시장에 가봐도 찬바람만 분다.워낙에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탓에 명동 큰 손들도 웬만한 담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현재의 자금경색 국면은 엄격히 말해 현대그룹 등 각 개별 그룹사들의 자금난 때문에 촉발됐다.그러나 대부분의 금융전문가들은 정부가 스스로 발목을 묶었기 때문에 자금경색국면이 심화됐다고 꼬집는다.금융전문가들은 금융시장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분통을 터뜨린다.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는

금융기관이 몸을 사려 기업 대출을 회피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전한다.

실제 LG투신은 지난 해 7월 대우의 자금난을 사전에 감지했다.이에따라 LG투신은 꾸준히 대우CP를 환매했다.대우그룹이 부도난 시점에 500억원 상당만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 회사는 정부의 협박에 가까운 협조요청에 못이겨 결국 900억원을 추가로 부담했다.

1년이 지난 현재 정부 말을 따랐던 LG투신은 덤터기만 썼다.정부가 원금 20%를 탕감하라고 채근하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LG투신은 채권 수익률은커녕 원금 280억원까지 떼일 형편이다.이처럼 정부 지시를 따랐다가 엉뚱한 부실만 떠안는 상황에서 각 금융기관이 정부 말을 쉽게 들을리 없다.

최근 제주은행과 합병설이 나돈 모 종금사도 시장의 믿음을 잃은 탓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례.이 종금사는 현재 6000억원의 상환 요구가 한꺼번에 몰린 탓에 몸살을 앓고 있다.이 종금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대부분의 기관투자자 및 개인투자자들이 일시에 예치금 상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회사 대표이사가 은행과 합병설이라는 내부정보를 이용,주식시세차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뒤였다.시장이 믿음을 거두고 응징한 셈이다.결국 이 회사 대표이사는 물러났다.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금융기관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을 웅변하는 사례이다.

기업들 사정은 더 어렵다.일반 기업들이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리면 바로 부도라는 나락으로 떨어진다.CP를 차환(revolving)하지 못하면 당장 사채시장으로 뛰어가거나 은행에 당좌차월 한도 증액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쌍용그룹의 위기설은 아예 실명으로 나돌았다. 금융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심정적인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사태라고 전해진다.이에 따라 당초 10월께 계획했던 정보통신 관련 업종 지분 매각도 앞당겼다.또 보증보험을 통해 만기도래한 900억원의 회사채를 가까스로 차환했다.

시중 자금난을 부채질하는 또 다른 징후는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도 감지된다.종로에서 이름난 삼계탕집을 하는 정모씨는 수십억원대의 자산가다.배운 건 없지만 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감각적이라고 자부하는 정씨.정씨는 최근 개인 투자금 모두를 미국계 은행인 시티뱅크에 예치했다.

금융권 구조조정이 가시화되고 있는 마당에 최근 도입된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은행이 파산할 경우 개인당 2000만원까지만 보장받기 때문이다.

정씨는 예금자보호법을 고집할 경우 국내 시중은행도 10월께 대거 인출 사태에 시달릴 것이라고 예상했다.현재 주변에 소위 돈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정씨와 같은 생각이라고 전한다.정씨는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가 가기전에 다시 IMF사태를 맞을 것이라고 목청을 돋웠다.

/ pch7850@fnnews.com 박찬흥 김종수 이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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