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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실리콘밸리를 찾아서 5] 산호세 실리콘밸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06.29 04:43

수정 2014.11.07 14:09


실리콘밸리는 아직도 도전정신으로 가득찬 벤처 창업의 모태이자 육성의 요람이다.

이같은 사실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새너제이에 있는 창업보육센터 IBI (International Business Incubator)다.IBI는 해외 기술기업의 실리콘 밸리 전진기지로 멕시코·인도·일본 등 해외 기술업체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식 부의 창출’을 꿈꾸며 몰려드는 곳이다.

이들은 본사를 본국에 둔 채 이 곳에 회사를 차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린다.실리콘 밸리 업체를 상대로 자신의 기술을 팔아 언젠가는 이 자그마한 큐비클(칸막이로 된 간이 사무실)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사무실로 옮겨갈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기술회사를 설립해 키워나가면서도 회사를 적기에 처분해 탈출하는 방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이들 해외업체 중 실리콘 밸리 특유의 ‘회사 매각이나 상장’ 철학을 익힌 회사는 거의 없다는 얘기다.IBI가 설립된 지 4년6개월이 흘렀지만 IBI 근처에 모여 있는 해외 신생업체 가운데 상장에 성공했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도 변하고 있다.

시스코 시스템스는 미국식 창업 모델이 이들 해외업체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스코틀랜드의 소프트웨어 신생기업인 어틀랜테크 테크놀로지스사를 인수했다.어틀랜테크는 새너제이 다운타운의 한 사무실 빌딩 6층에 자리잡고 있는 스코틀랜드 기술연구센터에 소속된 4개 업체 가운데 하나다.

같은 층의 옆 사무실에는 새너제이주립대학과 새너제이시가 설립한 IBI가 있다.미로같이 퍼져 있는 이곳 사무실에서는 세계 각지 22개국에서 몰려온 해외 기업인들이 땀을 흘리며 일에 몰두하고 있다.

시스코는 지난달 마무리된 주식 및 현금 거래에서 어틀랜테크 인수를 위해 1억8천만달러를 지불했다. 글래스고에 11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어틀랜테크는 인터넷 서비스업체 및 통신기업들이 온라인 서비스를 모니터할 수 있는 시스템관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다.

92년 어틀랜테크를 설립한 40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데이비드 시발드는 안정적인 기업문화 때문에 동적인 기업가 정신이 형성되지 못한 스코틀랜드에서는 미국식 ‘탈출 (exit : 회사 매각이나 기업공개 등으로 일찌감치 큰 돈을 챙기고 손을 터는 행위)’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그는 스코틀랜드의 기술 회사들이 계속해서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공개(IPO)나 매각 등이 더 일반화될 수는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스코틀랜드의 창업보육업체도 지난 몇 년간 실리콘 밸리의 독특한 경제구조를 배우기 위해 몰려든 여러 나라의 회사들 가운데 하나다.하지만 운영하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이 보육업체의 새너제이 사무소장인 진 카데나스는 스코틀랜드의 보육업체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며 미국내에 있는 나머지 3개 보육업체를 합쳐 연간 213만달러의 운영비용이 든다고 밝혔다.새너제이 사무소는 스코틀랜드의 신생기업에 1년 동안 사무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시장조사 및 판매지원 등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다른 곳의 보육업체들은 경영 컨설턴트에 더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기업들은 보육업체의 매니저들에게 수수료와 판매 및 벤처캐피털 투자에 대한 대가로 주식을 지급하기도 한다.보육업체에 지급되는 주식은 일반적인 벤처캐피털이 받는 주식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다.

카데나스 소장은 스코틀랜드 정부가 미국내의 벤처투자를 경제발전의 새로운 길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다른 나라 정부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정부도 실리콘 밸리의 창업정신이 자국내 기업에 자극제로 작용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다시말해 기술업체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분사 형태로 다시 본국에 기술을 들여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IPO나 매각을 통해 탈출하는 문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이다.지난주 일본 정보통신 기술업체를 대상으로 문을 연 멘로파크의 보육업체 IBT 벤처스사의 패트릭 브레이는 일본 기업들의 경우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고 밝혔다.그는 일단 설립한 회사는 최선을 다해 유지하는 것이 일본의 기업문화지만 실패를 겪다 보면 이 같은 풍조도 바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곳 새너제이에도 한국 출신의 벤처캐피털을 지원하는 기관이 두군데 있다.아이파크와 한국소프트웨어인큐베이터(KSI)가 그곳이다.이 두곳은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업체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파크의 엄청난 자금력과 KSI의 다년간의 노하우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의 한국 벤처캐피털들은 아직 대부분 우물안 개구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일부에서는 한국인들끼리 모여 일종의 ‘고립된 아일랜드’를 이뤄 결국 미국에 모여든 전세계 첨단 업체들과 제대로 경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리콘밸리는 변화하고 있다.그러나 실리콘밸리내 한국기업들은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그러나 실리콘밸리에 대한 성급한 예단보다는 한국 벤처기업들의 미국내에서의, 세계 속에서의 위상 정립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 pontifex@fnnews.com 고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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