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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야기-강길부] 神과 人間이 만나는 국사봉

남상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07.18 04:48

수정 2014.11.07 13:49


국사봉은 한자로 國師·國祠·國思·國事·國賜등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다.국사봉은 신(神)인 하늘과 땅인 인간이 만나는 매개체적 기능을 지니고 신사를 올리는 신성한 곳으로서의 의미가 큰 곳이다. 대개 산신을 모시거나 사당이 있는 산을 국사봉이라고 한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각 고을의 진산에는 작은 집을 세워 국사당(國祀堂)이라 하였다. 국사당은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비는 곳으로 국조신(國祖神)을 모신 사당이었다. 조선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 뒤편인 북쪽에 북악신사(北岳神祠),그 앞쪽인 남산에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세워 서울의 수호신인 호신신장(護身神將)을 그 꼭대기에 모셨다.
국사당은 일제 식민지때 신궁(神宮)이 들어서면서 1925년 7월에 인왕산 중턱의 현 위치로 옮겨졌다.

5만분의1 지도를 놓고 보면 강원도 고성군과 회양군 사이,충북 음성군,옥천군 그리고 경북 상주군에 국사봉이 보인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국사봉이 200곳을 넘을 정도로 많다.

왕은 직접 국사봉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해서 조선조시대에는 기우제가 하나의 커다란 국가적 행사였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역사 이래 구한말까지 홍수가 123회,한해(旱害)가 89회를 기록하고 있다. 전통적인 미작사회(米作社會)에서 물은 농민들의 사활문제였다. 물을 얻으면 그해 농사는 성공하는 것이고 그 반대로 물을 얻지 못하면 그해 농사는 단념하고 유민이 되는 수밖에 없다.

비가 오래 오지 않으면 왕은 스스로 부덕함의 소치로 보고 목욕재계하고 내방(內房)을 피하며 방사(房事)를 금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한편 죄수를 석방시키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백성들도 이럴 때 낚시를 하거나 투망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이 발각되면 곤장 80대를 치고 전 가족과 함께 북쪽 국경지대로 추방했다.

태조는 수령이 바뀔 때 제방축조,관개증대(灌漑增大)를 기록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토록 하여 수령고과(守令考課)로 사용하였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태종의 기일(忌日)인 음력 5월10일에 오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한발이 매우 심하여 태종이 상제(上帝)에게 하늘을 우러러 천신제를 올려 비를 내리게 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풍 ‘카이탁’이 최고 200㎜의 비만 뿌려주고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하여 ‘그놈 참 효자’ 소리를 들으면서 지나갔다.


엊그제까지도 비가 오지 않아서 모내기조차 못하는 곳이 많았고 저수지가 갈라지는 곳도 있어 옛날 같으면 왕과 고을 수령이 국사봉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을 정도로 꽤나 애를 태우던 참이었는데 정말 고마운 일이다.

/한국감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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