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금융일반

[fn 핫라인-심각한 중견기업 자금난]사채도 씨가 말랐다

이영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09.05 05:01

수정 2014.11.07 13:01


정부의 잇단 자금시장 안정화대책에도 불구하고 중견·중소기업(이하 중소기업)들은 시장에서 돈이 돌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재벌그룹 계열사들도 일부 신용상태가 좋은 그룹을 제외하고는 사정이 마찬가지다.

2차 금융구조조정을 앞두고 은행,투신,신용보증기관 등 금융기관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가운데 최근 연이어 터지고 있는 대형 금융사고로 인해 대출창구가 극도로 경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지만 정부의 약속과는 달리 자금시장의 수급여건은 점점 기업들의 숨통을 조이는 형국이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자금시장 안정을 위해 ▲추석자금 4조5000억∼5조원 지원을 비롯 ▲총액한도대출 확대 ▲회사채 부분보증제 시행 ▲채권펀드 추가조성 ▲환매조건부채권(RP)을 통한 은행 유동성 강화 ▲투기등급 이하 채권 편입 확대 등을 골자로 한 안정책을 마련,시행에 들어갔으나 중소업체들의 자금난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자금시장에서는 추석을 고비로 일부 업종 몇몇 대형기업들이 생존의 갈림길에 설 것으로 내다보고 조바심을 내고 있다.


은행권의 경우는 정부의 8월 자금시장 안정화대책 발표 이후 대출규모가 다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한빛은행은 7월 말 32조2855억원에서 8월말에는 32조4280억원으로,외환은행은 6조9673억원에서 7조1975억원,조흥은행은 7조9991억원에서 8조1140억원으로 소폭 증가했으며 나머지 은행들도 증가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금융권의 대출세일이 자력 자금확보가 가능한 일부 대기업에 집중되고 대부분의 중소업체들에서는 비켜나 있다는 것이다.

SK,롯데,삼성,LG 등 핵심그룹 이외에는 대기업들도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의 신규발행이나 만기연장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그룹 이외계열의 건설사 등 불황업체들은 아예 외부 수혈을 포기,그룹 주력사로부터 내부거래를 통해 자금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증시 침체로 인해 증자도 어려운 상황이다.

중견기업들의 경우 회사채 시장에서는 시중금리의 2배에 가까운 연 15∼16%에라도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지난달부터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의 회사채를 모아서 프라이머리 CBO(발행시장 채권담보부증권)가 발행됐지만 돈가뭄을 해갈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120개사가 참여,2조5000억원 규모로 발행돼 해당기업들에는 다소간의 해갈이 됐을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기업들은 자금이 부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행에 참여하는 한편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인 회사들은 주간 증권사에 로비를 펴도 발행기업 리스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자금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한 중견기업의 대표이사는 “거래기업의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선뜻 돈을 빌려주기는 어려운 입장들”이라며 “하지만 최근의 자금상황은 신용등급이 BBB급 이상으로 높은 편인데도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의 30% 이상을 갚아야 차환을 발행할 수 있을 정도로 금융권의 횡포가 극심하다”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의 경우 이달 들어 명동 등지의 사채시장에 자금담당자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으나 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주물업체인 H사 자금담당 부장은 “사채시장에서 금리를 2배 이상 주더라도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업계 형편이다”고 말했다. 자금악순환이 계속되면 누가 넘어질 지 종잡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금경색을 틈타 회사채시장에서는 꺾기도 극성이다. 이같은 기업의 자금난 심화는 금융권의 여신관행 개선에서 비롯됐지만 ‘무지에서 출발한 지나친 몸사리기’라는 지적도 높다.

평택에서 D건설을 운영하는 권모 사장은 인근 H은행과 C은행을 찾았으나 은행측이 발등의 불인 경영정상화 계획서 제출로 대출을 긴축 운용하고 있다며 거부,자금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권 사장은 “추석을 앞두고 긴급 운전자금과 함께 급여,상여금 지급을 위해 거래은행에 대출신청을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며 “예전보다 훨씬 대출받기가 어려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용인에서 사출성형을 전문으로 하는 T엔지니어링 고모 사장도 추석자금 마련을 위해 주거래은행인 H은행을 찾았으나 추석 이후에 다시 상의하자며 대출을 거부,막막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해당은행 관계자들은 “경영정상화 계획서 제출때문에 대출을 못해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뭔가 대출과정에서 하자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잇따른 금융사고 이후 일선 영업점의 여신관행도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이번 금융사고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S은행 동수원지점 김모 지점장은 “솔직히 말해 잇따른 금융사고 이후 대출해주는게 겁난다”며 “기업들이 대출을 신청할 경우 예전보다 까다롭게 해주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자가 높더라도 긴급자금 조달이 가능했던 97년 말 직후보다 기업자금 사정이 더 어렵다는 탄식까지 나오고 있다.

/ csky@fnnews.com 이영규 차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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