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단체

[긴급제안-경제시스템을 바꾸자(5)]사회적 합의 시스템

박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09.07 05:02

수정 2014.11.07 12:59


유럽사회를 견인하고 있는 원동력 중의 하나로 ‘사회적 협의’가 꼽힌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이해관계 대립이 생기면 당사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협상을 벌이는 시스템이 오래전부터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이해충돌에 따른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고 공생을 획득해내는 유럽사회의 힘이 협상에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항운노조가 무분규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데 있다.세계 최강 노조라는 벨기에 안트워프항이나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의 항만노조는 70년대 말이후 임금·근로조건 협상과 관련해 거의 파업을 벌이지 않고 있다.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고 있는 덕택이라는 게 항만청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안트워프 항만청의 구오 진 류는 “노조대표와 사용자 대표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게 1929년 이후의 전통”이라면서“매년 11월과 12월 양측이 머리를 맞대고 협상해 내년도 임금과 근로조건 등을 정하면 이를 모든 노조원들이 수용하고 있다”고 말했다.노사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게 1929년 이후의 전통이라고 그는 덧붙였다.바로 이때문에 벨기에 정부 당국자들은 노조를 두고 “강하지만 매우 협조적”이라고 추켜세운다.
노조 역시 파업의 피해를 잘 알고 있다.시간당 50달러 이상의 고임금을 받는 항만노조는 파업은 소득의 손실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사용자측은 이를 두고 “노조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말로 풀어쓴다.
사용자와 노조가 이해관계 상충으로 극단적 대립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중재자 역할이 크다.벨기에나 네덜란드의 경우 국책연구기관이 객관적 자료를 제공,중재자인 정부측에 중립성을 높인다.벨기에의 국책연구기관인 연방기획청(FPB)은 법으로 자료를 노조에 제공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이같은 협상시스템의 다른 예는 아일랜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업계가 정보통신 분야 등에서 인력수요를 제기하면 정부는 산·학·연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 팀이 정기모임을 갖고 인력수요와 공급능력,대학의 학과 현황 등을 정확히 파악해 정부에 건의하면 정부는 학과를 신설해 인력을 충당한다.

이같은 사회적 협의시스템은 네덜란드에서는 폴더모델(Polder Model)로 정착됐다.송영식 주 네덜란드 대사는 “폴더 모델의 바탕에는 양보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네덜란드인의 인식이 깔려있다”고 말했다.네덜란드는 80년대 임금폭등과 노사분규로 극심한 ‘네덜란드 병’을 앓다가 경제주체들의 협상과 양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사용자와 노조·정부 등 3자가 건설적인 의견을 교환한 결과 임금상승은 최소화하고 해고는 자제하면서 근로시간을 단축해 사용자의 안정적인 투자를 이끌어냈다.

폴더모델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일단 합의를 통해 결론에 도달하면 무서훈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건실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게 바로 폴더모델이라고 송대사는 덧붙였다.

배손근 노사정위원회 상무위원(경제학박사)은 “유럽은 100여년에 걸쳐 노사정 협의의 문화를 정착시켰다”고 설명하고“한국도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협상과 협의의 시스템을 뿌리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용자와 노조가 임금협상을 둘러싼 파업과 이로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같은 시스템의 도입이 매우 시급하다는 것이다.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들의 폐업도 협의시스템의 부재가 빚어낸 산물로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 구축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배위원은 지적했다.

의사와 약사간 대립이나 지역개발을 둘러싼 주민들의 반발은 그러나 사회적 협의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겉보기에 극단적 이기주의의 표출로 보이지만 자기이익의 옹호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도 이해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돼야할 것은 중재자인 정부가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절하고 여과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느냐의 여부다.정부는 사전에 충분한 여론수렴과정을 거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는 것이다.한 전문가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스케줄을 짜놓고 밀어붙이기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분쟁발생의 상당한 요인이 되고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회적 협의체제는 노사정위원회다.그러나 98년에서야 출범해 운용역사가 일천한데다 대통령 자문기구에 불과할 뿐 아니라 주로 노동문제만 다루고 있다.게다가 공익대표의 역할도 크게 눈에 띄지 못했다.의료분쟁은 보사부 관할이어서 다루지도 않고 있다.의료분쟁을 다룰 의료관계특별위원회가 곧 구성될 전망이지만 준비부족으로 제대로 될 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많다.

/ john@fnnews.com 박희준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