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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밀큰연구소 특별기고]동아시아 개혁진단

최승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10.08 05:10

수정 2014.11.07 12:37


한국은 과연 3년 전의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는가. 태국을 진원지로 동아시아 전역에 파급됐던 금융위기가 되풀이될 가능성은 없는가. 한국이 지난 97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함으로써 이른바 ‘IMF 관리체제’로 들어선 것이 다음달로 만 3년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미국 유수의 싱크탱크인 밀큰연구소의 세계경제분석실장 힐튼 루트 박사가 본지에 특별 기고를 해 왔다. 아시아개발은행(ADB)수석고문을 역임한 루트 박사는 널리 알려진 아시아 전문가. 루트 박사는 장문의 이번 기고문에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개혁이 아직 미흡하다고 지적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더 폭넓은 역사적 통찰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97년 경제위기에서 예상 보다 빠른 속도로 탈출한 덕분에 이제 경제회복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한국은 과거와 달리 금융개혁 과정을 시의적절하게 국민에게 밝힘으로써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태국은 파산법을 도입했으며 인도네시아는 부채 정리와 금융시스템 개혁을 위해 파산 은행의 금융자산을 모두 정부가 운영하도록 했다.


국내총생산(GDP)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등 동아시아 경제의 회복세가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나 서방 전문가들은 제2의 경제위기를 촉발할 수 있는 취약점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취약점은 기업지배 구조의 과도한 집중과 생산시스템의 폐쇄성이다. 소수 족벌과 소수 재벌이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한 글로벌 신경제의 대열에 동참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 기적을 이룩한 국가라고 높은 평가를 받던 나라들이 어쩌다 오늘날 이런 소리를 듣게 됐을까. 과거의 방식이 전부 잘못됐다면 지난 60∼97년 세계 경제성장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떠오를만큼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룩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국가들이 안고 있는 경영조직의 문제점을 앞장서서 지적하는 경제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동아시아 지역이 현재의 경영조직을 갖추기까지 어떤 사회·역사적 배경이 있었는가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만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그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이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의 산물이라는 점이며 서구식 개혁의 필요성을 몰라서 문제를 방치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동서양 사이에 존재하는 이같은 오해가 해소되지 않고 방치될 경우 새 위기가 촉발됨으로써 미국은 아시아 주요 교역국과 폭넓은 협력관계를 도모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시아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리가 성행했을 뿐 아니라 빈부 격차도 여전하고 무리하게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비평가들은 기업지배 구조의 집중화를 부른 원인이 단순히 경제개혁만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기업의 자발적 의지 보다는 제대로 된 계약문화의 부재와 정부의 간섭이라는 사회·정치적 환경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기업지배 구조의 집중화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의 금융시스템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의 방식이 모두 잘못됐다면 아시아의 경제기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3년 전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환율·증시 폭락 등 동아시아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져 채무 불이행 위기에까지 몰린 적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금융기관이 유례없는 대규모 합동 진화에 나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복구작업을 지원했으나 여기엔 이들 국가의 기본 경제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늘 뒤따랐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동아시아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경제위기 주범의 하나였던 잘못된 기업관행에 아직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큰 문제는 아시아가 아직도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즉 지난 97년 경제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에 대한 저항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일례로 일본은 별 소용없는 개혁 프로그램만 마냥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은 사전에 발표한 일정표에 맞춰 개혁을 시행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분야에 대해 여전히 보호정책을 쓰고 있으며 무수익 부실채권을 정리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다.

일본 외에 한국·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 등에서는 민간업체간 카르텔(기업연합)이 아직 성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도산한 은행들이 평소처럼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다. 파산법은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고,계열사간 부채에 대한 상호지급보증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으며,금융기관에 대한 감독 역시 국제기준에 미달이다.

국유화 한 금융자산에 대한 개혁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무수익 대출금에 관한 규정도 명목 뿐이다. 또 중립 기구에 의한 주식시장 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소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는 아직도 취약하다.

소액주주의 권익보호,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외부 감사의 강화,법적 절차의 투명화,감독기관과 피감독기관의 구별 등은 모두 합리적인 지적이다.

비평가들의 이같은 지적은 대부분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들에게 폭넓고 역사적인 통찰력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정실(情實)주의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실패를 바라보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일이다. 아시아에 존재했던 불확실성의 시대에 과거의 잘못된 방식도 알고보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대안으로 그 역할을 감당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아 기업들은 아시아 만의 독특한 편의주의,과도한 위험감수,정부의 유용(流用)이란 난제를 극복하면서 생존해야 했다. 그 결과 기업이 정부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영업이익을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고 외부 투자가들도 내부자(투자국 정부)에 의한 유용을 막을 보장이 없는 경우 섣불리 투자하려들지 않았다. 이같은 리스크를 막기 위해 기업들은 지금은 한물 간 것처럼 보이는 제도적인 혁신·규정·절차 등 조직적인 자본을 조성했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이 조직적인 자본력이다.

미국에서는 경제 교역이 대부분 계약자간에 이뤄지는데 이들은 대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거래를 맺는다. 거래는 ‘통상적인 조건과 동등한 기준에 의한’ 원칙(arm’s length)에 따라 이뤄지며 리스크는 상대방이 감수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철저한 계약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고 생산시스템도 폐쇄적이어서 거래에 따른 리스크를 내부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동등한 거래는 별 의미가 없다. <‘동서양의 역사적 비교’ 참조>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다른 진로
일본과 한국 기업은 외부에서 기인하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구매·판매·생산 등을 위한 내부 네트워크를 형성해 대처해 왔다. 동등한 당사자 거래에 의한,시장에 기반한 거래방식을 배제하는 대신 공급업체와 물류시스템을 직접 지배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게이레츠(系列)’ 다.

게이레츠는 소규모 국내 제조업체와는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들끼리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계열 구조다. 이런 체제는 상당히 광범위한 거래를 비교적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폐쇄적 구조를 낳아 시장이 가격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리스크를 덜어줬다.

게이레츠는 결국 유력 은행을 계열사로 보유한 산업재벌로 발전해 계열사끼리 철저히 정보를 공유하게 됐다. 일본 기업은 자금원이 되느냐(아니면 보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갈린다. 영업실적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저당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사정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에 대출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의 내부사정에 대해 내부자만큼이나 훤히 알고 있어야만 한다. 아시아에서 리스크 평가에 필요한 정보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따라 외국 투자가들은 투자를 기피하고 기업들은 외국 자본시장에 눈돌릴 여력이 없어 자본을 국내에서 회전시키는 데 그치고 만다.

일본 기업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기업은 대부분 가족이 소유하고 관리한다. 대체로 족벌 지배가 강할수록 부패가 만연하며 법의 지배가 약하고 사법체제가 부실한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족벌지배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패가 심하고 법 질서가 엉망이다. <그래프 참조>

기업지배 구조의 개선에는 전반적인 상거래 환경의 개선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에 결국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이 뒤따를 수 있으나 족벌경영체제가 만연한 국가에서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유전무죄식 판결이 가능하고 금력이 선거결과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긴 설명이 필요없다. 이처럼 복잡한 측면을 폭넓게 들여다보지 못한 채 아시아 경제문제에 대해 지적한다면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같은 역사적인 차이는 동서양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간에도 차이를 만들고 있다. 동남아 국가는 전통적으로 계약이란 규범의 영향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개방적인 생산시스템을 도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동남아시아 기업은 개인적 친분관계·신분 고하·불명확한 계약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재산권이 확립되지 않고 제3자 중재시스템이 취약함에 따라 거래상의 문제가 흔히 발생하지만 이들은 대인관계에 막대한 돈을 투자해 그런 문제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는 거래의 대상이나 담보가 될 수는 없지만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막대한 자산으로 간주된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가치체계가 없었다면 이 지역 나름의 사회적 협력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경제 성장도 도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차이점이 바로 동북아가 현대적인 복잡한 기업구조를 빨리 채택하고 동남아시아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동북아에서는 강력한 국가가 존재해야만 기업의 대외적인 금융조달이 원활해질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해 자본구조를 결정한다. 그 결과 정부의 관료주의적 개입 정책에 따라 강력한 산업재벌이 자연스레 육성되고 유지돼 왔다. 재벌조직은 특히 자본시장의 취약성을 보완해주는 한편 비교적 느슨한 인적관계에 기반한 거래문화는 국가가 동등한 당사자 거래에 필요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문제점을 해결해 준다. 인적관계 중심의 거래는 종종 국가의 독단적,강압적 개입에 대한 방어수단 역할을 한다.

동남아시아,특히 경제발전 보다 정권의 이익이 앞서는 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에서는 체제문제로 인해 동북아 재벌이나 서방국가의 투자없이는 경제성장을 도모할 수 없을 만큼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지역 국가의 수출품은 대부분 일본이나 기타 외국계 기업의 제품이다. 동북아 기업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서 현지 공급업체와 맺는 계약의 내용은 대부분 막연한 경우가 흔하며 고객들도 이들 업체의 경쟁사 제품을 쓰게 되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 국가의 해외자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이 지역의 산업화가 가속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 지역의 경제는 그만큼 국제 가격의 변동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아시아의 경제수준은 폐쇄적인 거래·생산시스템으로 인해 철저히 계약위주로 이뤄지는 거래방식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가 효율적인 계약문화를 정착시키려면 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오늘날 동남아시아 국가 중 어느 나라도 중립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거나 대외적인 계약시스템에 따라 거래를 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개선책

비평가들이 이 지역의 제도적 개혁을 평가할 때마다 실망을 느끼는 것은 카르텔이 성행하고 적절한 파산법의 시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부채구조를 개혁하지 않고 환심을 사는데 몰두하는 정치행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이 과거에 먹혔던 방식을 아직도 고수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의 잘못된 방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근저에 깔린 경영환경의 취약성이 하루아침에 개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지배 구조와 투명성의 수준이 여전히 미흡한 것도 영업실적을 공개하는 기업은 공연히 정부의 간섭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통제가능한 거래만을 하려든다. 그 결과 주로 폐쇄적인 생산시스템에 따라 이 지역의 거래가 이뤄지게 된다.

동북아와 동남아는 모두 초창기에 선진적인 경영 시스템이 없다보니 정부나 개인 차원에서 얼마 안되는 신생 우량기업을 통해 자본을 운영했다. 필연적으로 이들 신생 업체들은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그 뒤를 잇는 업체들 보다 상당한 이점을 안게 됐다. 물론 이들 소수 업체는 국제적인 협력관계 개발을 통해 시장을 지배해 나갔다. 반면 중소기업체는 현재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진적인 법 절차가 확립돼야만 이들 중소업체들도 자금난을 덜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는 효율적인 조직과 생산기술의 맹공을 저지할 능력이 없다고 한다. 동아시아가 교육수준이 높은 인적 자원과 현대적인 생산시설 등 그들이 보유한 자산을 극대화 하려면 외부 투자가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 지배구조가 타당성을 인정받고 경영의 투명성이 제고되지 않는 한 자본을 쥔 세력은 설사 유망한 사업이 있다 하더라도 투자를 줄이려 할 것이다. 기업들은 효율적인 계약문화가 여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변화를 기피하고 있다. 아무도 아시아에 대해 폐쇄적 구조를 새 경제발전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하지 못했다.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은 지난 97년 경제위기에서 폐쇄적인 생산시스템은 유연성이 없으며 대외적인 법 절차를 강화하고 좀더 객관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개방화의 필수조건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최근 미국의 고도 경제성장에서 보듯이 시장이 주도한 금융시스템 없이는 밝은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래자의 부채현황을 손쉽게 파악하고 알릴 수 있는 인터넷의 출현도 역시 변화를 촉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화 모델이 아시아 지역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수용될 수 있을 지,어떻게 경제성장을 도모함과 동시에 변화를 이끌어 나갈 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분분하다. <‘동북아와 동남아 비교’ 참조>

심지어 지난 40년간 줄곧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 같은 국가도 법의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법률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고 국민여론에 맞게 필요에 따라 법 개정이 가능해야 하며 잘못된 법 적용을 눈감아주지 않는 중산층 등 개방 경제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필수요건을 많이 결여하고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적인 직무를 구별할 줄 아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는 전제아래 전문적인 성격을 지닌 중산층이 있으면 계약이 계약대로 집행되고 국가운영이 객관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산계급의 힘은 전문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전문그룹으로서의 중산층은 국가가 기업의 형태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사회적으로 개인이 하류계급에서 전문적인 상류층으로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나라가 아시아에는 많다. 싱가포르·일본·한국·대만 같은 관료사회에서는 그런 기회가 있으나 아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도네시아·필리핀에서는 정치적인 끈 없이는 고위층에 오르기 어렵다.

게다가 아시아 기업들 가운데 중국·북한·베트남·미얀마 등 변경 지역에서는 재산권 보호라는 기본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식 모델을 도입해봤자 산업화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특히 중국의 경우 계약중심의 사업조직이 왜 필요한 지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다. 그러면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이런 계약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을까. 중국은 경험상 동아시아에서 완성된 폐쇄적인 생산시스템이 서구의 개방적인 모델보다 아시아적 상황에서는 더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다.

이같은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새 합의가 필요하다. 개선책으로 정치의 경쟁개념 도입,교육 기준의 개선,중립적인 언론의 확립,회계사·변호사·법관에 대한 현대 계약법·회계감사 교육,위에서 열거한 전문적인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 대접받는 행정체제의 수립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압력은 미국이 동아시아와 협력관계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시아 경제위기가 이제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전 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싹트기 시작하고 있어 미국과 아시아 우방이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아시아 각국은 자국 내에 나름의 통화담당 기구를 설치하려고 할 지 모른다. 아시아인들은 서구 업체가 기대하는 것처럼 시장이 빨리 변하는 것을 반기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서구식 기업을 움직이는 효율성의 원칙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아시아 기업들도 잘 안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관습이라는 내부적 문제 때문에 동아시아 기업의 글로벌 경제 참여가 봉쇄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필요성이 (단기적으로) 개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지만 좀더 장기적인 해법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 경제가 고도 성장을 누리고 있고 미국의 변함없는 동아시아 안보공약을 바탕으로 개괄적인 수준의 개혁을 위한 기반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미국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는 미국식 경제모델에 따른 미래에 대해 동아시아 국가들이 왜 주저하고 두려워 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당분간은 (국제적 금융기관에 대한 지배력 등을 매개로 한) 압력을 행사하는 식의 접근법은 피하고 (동서양의 역사적 차이를) 서로 이해하는 등 건설적인 접근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향후 동아시아 국가와의 협력관계에 있어 오히려 미국에 유익할 수 있다. 아시아가 미국식 경영기법에서 배울 것이 많은 것처럼 미국도 아시아적 상황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


상대방은 싸움에 임할 준비가 안된 상태인데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해 버리고 마는 식이라면 건설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rock@fnnews.com 정리=최승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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