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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진단]한번쯤은 권리를 아끼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11.09 05:19

수정 2014.11.07 12:09


지금 우리사회의 분위기는 겨울의 문턱만큼이나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퇴출기업이 발표되고 대규모 금융구조조정이 예견되면서 우리는 또 다시 3년전에 맞았던 국제통화기금(IMF) 전야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정부 대로 4대부문의 개혁을 내년 2월까지 완료한다지만 과연 정부의 공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신뢰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양산되는 실업자들, 미취업된 대학졸업생들, 무너지는 가정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IMF체제 조기 극복을 공언하고 샴페인을 터뜨린지 불과 몇달도 안된 사이에 이처럼 새롭게 난국이 조성된데는 정부의 무사안일과 도덕적해이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우리 일반 시민들에게도 일단의 귀책사유가 없지는 않다. 시민의 책임보다는 시민의 권리에 목소리를 높여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권리와 이익의 사회이며 시민들이 ‘권리의 보유자’임은 고전적 사회개악론자들의 통찰을 경청하지 않더라도 자명한 사실이다. 모름지기 민주시민이라면 남에게 양여할 수 없는 기본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로크(J. Locke)가 강조했던 자유권·재산권·생존권의 범주를 넘어서서 노동권·학습권·환경권·일조권·의료권 등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우리 사회도 개인과 이익단체들이 주장하는 각종 권리들로 넘쳐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 각자가 ‘권리(right)’를 갖고 있음은 확연하지만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right)’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지하철의 한자리가 비었을 때 그 앞에 있던 젊은 사람 ‘갑’은 그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지만 그 옆에 노인 ‘을’이 서있을 경우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은 아니다.

또한 병원에 먼저온 환자 ‘병’이 먼저 의사의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늦게온 환자 ‘정’의 병세가 더욱 절박하다면 ‘병’이 먼저 진료받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회사가 부도난 상황에 처했을 때 근로자들은 파업권을 행사할수는 있겠지만 파업에 관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각종 권리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졌다. 각 개인들이나 이익단체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생각할 때 서슴지 않고 집단행동에 나서며 또한 시민단체들도 개인의 훼손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 결과 서울의 중심도로는 연일 시위와 농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권위의식의 고양이 민주사회의 한 특징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권리를 자제하거나 양보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라는 사실이 바래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개인과 집단이 각기 권리행사를 주장하면 그 주장은 정당하나 문제의 민주사회는 존속하기 어렵다. 마치 예금주가 예금을 인출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여 모두 동시에 그 권리를 행사하고자 하면 은행이 망할 수밖에 없듯이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권리 양보의 미덕이 필요하다. 또한 그러한 사회가 바람직하며 건강한 민주사회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게 된 위기의 일단은 개인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할뿐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한 결과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강조하거니와 민주사회의 시민에 있어 권리의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이거나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민정신이 시작된다는 사실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박효종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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