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신뢰가 무너진 사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11.26 05:24

수정 2014.11.07 11:58


한나라의 발전과 성숙정도를 가늠하는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국민소득수준과 교육정도·산업화·도시화·정보화·복지후생·인권·국민의 법질서의식 등 극히 다양하다. 그 사회에 대한 신뢰도 또한 중요한 바로미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정도는 소득수준과 같은 가시적이고 계량가능한 수치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는 신뢰가 실종된 상태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의 실종상태는 그 심도를 더해가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특히 지도층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 아노미 현상이 나타나고 이익집단 간의 마찰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불신에서 비롯된다. 신뢰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조지 메이슨대 교수)의 이론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그 이론의 골자는 ‘한 나라의 경쟁력과 행복은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선진사회일수록 사회 밑바탕에는 신뢰가 강물처럼 흐른다. 거짓과 사술이 판치는 사회에 신뢰가 쌓일 수 없고 신뢰가 없는 사회가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는 없다.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신뢰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이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지도층 인사들이 신뢰를 잃고 불신받고 있는 데에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의 불신을 받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고 검찰의 중립성에 많은 국민들은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으며 정부관리들의 발언에 믿음을 주려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신뢰를 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신뢰를 잃고 불신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검찰총장 탄핵안을 저지하기 위해 보인 집권여당 민주당의 태도는 정부와 정치권,그리고 이 나라 지도층에 대한 신뢰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하던 ‘국회법 절차’와 ‘다수결 원칙’은 의정사상 초유의 집권여당에 의한 국회의장 감금이란 저급 쇼에 의해 필요에 따라 변질될 수 있는 원칙임을 드러냈고 석연치 않은 국회의장의 언동은 국민의 대의기관의 수장으로서의 신뢰에 스스로 먹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난 주부터 관가에 불기 시작한 사정바람에 대한 대상자들의 냉담한 반응도 따지고 보면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마지막 결전’이라는 고위층의 다짐에 관가의 반응은 ‘정작 사정할 곳은 따로 있는데…’라거나 ‘누가 누구를 사정하느냐’는 것으로 요약된다. 국면전환용 사정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리척결과 사정의 중심이 되어야 할 주체에 대한 극심한 불신때문이다. 동방·대신금고거액 불법대출과 로비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수많은 의문점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마무리됨으로써 불신은 더욱 증폭되었다.

지난해 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옷 로비 사건에서 우리는 불신의 극치를 보았다. 모피를 선물하면서 로비를 벌였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국회 국정조사에서 고위 공직자와 재벌 부인 모두가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한 것은 우리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진실이 두개인가. 서로 엇갈린 진술은 지도층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은 부실은행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 소위 공적자금의 조성계획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2000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이미 투입된 64조원이외에는 추가자금이 필요없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입장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50조원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그것도 부족하여 더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미 100조원이상 투입되었는데 모두 150조원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국민의 혈세가 이렇게 낭비되어도 누구 한사람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누가 정부관리의 말을 믿으려 하겠는가. 감사원의 감사결과로 드러난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온 국민을 분노케하였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만연한 병리현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정운영방식을 쇄신해야 한다. 정파적 이익에서 벗어나 정부정책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정권재창출에 집착한 나머지 빚어지는 무리를 지양해야 한다.
충분한 토론을 거쳐 정해진 정책은 이해집단의 반발에 흔들림없이 집행돼야 하고 원칙이 타협되어서는 안된다. 법 집행의 공평무사함은 물론 집권층이 스스로에 엄격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붕괴되고 있는 신뢰의 회복없이 우리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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