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0일 급조해 발표한 상호신용금고 대책은 예고된 금융위기에 대해 당국이 뒷북을 쳤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
금고 업계는최근 45일 동안 10여개가 무더기 도산하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문제는 이같은 금고 위기가 상당부분 예고된 것이며 정부와 정치권이 방관차원을 넘어 조장한 측면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금고업계가 자생력을 상실한 채 공멸위기에 몰리자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금고업계의 사정이 이 지경으로까지 몰리게 된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최근 ‘대형 금고사건이 1∼2건 더 발생할 것’이라는 설익은 언급을 한 것도 직접적인 화근이었다. 이 수석 발언 이후 정치권에선 이 문제를 집중 부각시켰고 이는 다시 금고업계의 연쇄 예금이탈로 이어졌다. 현재 몇개의 금고가 예금이탈로 문을 닫을지 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당장 11일부터는 울산금고가 영업정지사태를 맞게 됐다. 이밖에도 여러개의 금고가 거액 전주들의 금고 기피 및 기존 예금 이탈로 문닫기 일보직전의 벼랑끝 위기에 몰려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주 말에서야 ‘앞으로 며칠을 넘기지 못할 금고가 여러개 나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금고대책’을 급조하기에 이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런 금고업계의 공멸위기는 앞으로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예금부분보장제 실시를 앞두고 닥쳐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금고발 금융불안은 자칫 전면적인 금융위기로 확산될 소지마저 안고 있다. 상황이 이쯤되다보니 정부의 ‘늑장대처’ 내지 ‘위기관리능력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특정업계를 둘러싼 위기가 닥칠 때마다 늘 그같은 가능성을 예견하면서도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막판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불끄기에 나서곤 했던 정부의 ‘안이한 행정태도’가 이번 금고대책에서도 여지없이 재연됐다. 고질적인 ‘책임회피성 복지부동 행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특정업계가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기 전에 손을 댔다가 나중에 자칫 무슨 원망을 들을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그릇된 인식 때문에 이같은 정부의 도덕적해이식 행정이 자꾸 반복되고 있다. 현대투신처리문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항상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사안을 가래로 막는 행태’가 반복되고 그에 따른 국민들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이번 금고대책도 예외가 아니다. 올 하반기 이후 금고업계에 대한 ‘공멸위기’는 늘 금융권의 최대 이슈로 부각돼 왔다. 내년 초 예금부분보장제가 실시되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곳이 ‘금고업계’가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 이같은 사정을 정부가 몰랐을리 없다.
금고업계를 둘러싼 이런 위기감은 지난 10월23일 이른바 ‘정현준 게이트’가 터지면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출자자에게 불법대출을 해준 동방,대신금고가 일시에 영업정지되고 이를 계기로 ‘제2,제3의 정현준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위기감도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정현준 게이트가 ‘잠재돼 있던 금고위기’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면 곧이어 터진 ‘열린금고 사건 (진승현 게이트) 및 이기호 수석의 위험한 발언’은 이같은 불길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정현준 게이트 이후 영업정지된 금고수만 10개를 넘을 정도다. 급기야 지난 9일엔 금고업계 3위인 동아금고가 예금이탈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금융감독원에 영업정지조치를 신청했고 11일엔 울산금고가 영업정지에 들어갈 만큼 금고업계를 둘러싼 상황이 심상치 않다. 정부가 금고업계에 대한 지원대책을 내놓은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대책만으로 ‘금고업계에 대한 위기감’이 진정될지는 두고볼 일이다. 정부는 금고업계 유동성 지원과 관련,거래은행들로 하여금 대출채권을 담보로 크레디트라인을 설정케 한다지만 이같은 방침에 은행들이 얼마나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아직 몇개의 금고가 더 쓰러질지조차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은행들이 선뜻 지원에 나서려 하지 않는 까닭이다.
H은행 관계자는 “얼마전에도 금감원은 금고와 종금사들에 유동성 확보령을 내린 바 있다”며 “그러나 금고구조조정이 채 끝나지 않았고 얼마나 더 많은 금고가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지원에 나설수도 없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정부가 퇴출대상 금고 명단과 불법대출 등의 사고에 추가 연루된 금고의 명단을 서둘러 발표해야만 은행권의 금고지원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부는 금고구조조정 및 사고금고에 대한 처리를 좀더 서둘렀어야 했다.
김중회 금감원 비은행검사1국장은 “때늦은 감은 있지만 구조조정 대상 금고 및 불법행위 추가적발 대상 금고의 명단을 서둘러 발표하겠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현재 올 하반기 실시된 60∼70개 금고에 대한 검사보고서를 작성중이다. 현재 진행중인 14개 금고에 대한 검사도 오는 14일까지 모두 끝낼 계획이다.
/ fncws@fnnews.com 최원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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