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대 미국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미국 전체 유권자가 행사한 1억여표가 아니라 대법관들이 던진 9표였다.
대통령 선거 개표 과정에서 불거진 일부 논란표를 기계가 아닌 손으로 다시 검표하라고 한 플로리다 주대법원의 판결을 “평등권을 위배했다”며 연방 대법원이 파기함으로써 1개월여를 끌어 온 지루한 ‘재개표 소동’은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에게 승리를 안기면서 결국 사법부에 의해 종식됐다.
이로써 지난 1787년 미국 헌법이 제정된 이래 213년만에 미국이 맞닥뜨렸던 헌정위기도 헌법수호의 최후보루인 연방 대법원에서 최종 수습되었다.
패배를 즉각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앨 고어 민주당후보는 전체 득표수에서 부시보다 30만표 이상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에서 지는 바람에 이 지역 선거인 25명을 부시에게 잃으면서 패배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느 후보든 전체 선거인 538명 가운데 270명 이상만 확보하면 승리하게끔 돼 있다. 부시는 플로리다에서 이김으로써 선거인 271명을 확보했다.
지난 며칠 사이 고어진영에서 각급 법원에 제기했던 소송이 모두 패배로 돌아간 뒤 고어 선거본부는 연방대법원 판결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 이를 초조하게 기다려 왔다. 그러나 연방 대법관 9명 가운데 5명이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는 쪽에 표를 던짐에 따라 CNN방송의 표현대로 고어는 이제 ‘탈출구가 없는’ 처지가 됐다.
유권자 득표에서는 이기고 선거인단 확보에서는 지는 미국 특유의 대통령 선거제도 역시 미국의 헌법정신에 따른 것이다. 결국 미국은 헌법을 정점으로 법률이 지배하는 선진 법치국가라는 사실이 이번 재개표 소동을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증명됐다.
미국 언론이 ‘재개표 전투’라고 명명한 플로리다 재개표 소동은 미국 역사에서 124년만에 재현된 극적인 선거 드라마였다. 공화당의 러더포드 헤이스 후보와 민주당의 새무얼 틸든 후보가 격돌했던 지난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번과 비슷한 접전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올해보다 한술 더떠 선거가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된 후에야 결국 공화당 후보가 승리자로 확정된 바 있다.
막판까지 불꽃튀는 접전이 이어지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플로리다 전투’에서 표면적 승자는 물론 부시지만 진정한 승자는 미국 민주주의라는 것이 많은 관측통들의 일치된 관전평이다. 비록 당파적 이해관계가 얽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국 민주주의는 건재하다는 사실이 이번 재개표 과정을 거치면서 입증된 셈이다.
이례적으로 12일 심야에 내린 판결에서 미국 대법관 9인은 플로리다 재개표를 허용한 플로리다 주대법원의 결정이 헌법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7대 2로 판결했다. 이어 법관들은 그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새 재개표를 명령할 것인지를 놓고 표결을 실시한 끝에 5대 4로 ‘불가’를 결정했다.
이들 대법관은 “12월 12일이라는 (플로리다주 선거인 선출) 시한을 맞추기 위한 모든 재개표가 비헌법적인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주대법원의 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정답이 없는 소모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공화당 성향이 지배적인 연방 대법원의 인적구성에 대한 논란의 소지를 남겼으며 이는 앞으로 상당 기간 연방 대법원을 곤혹스럽게 만들 것같다. 5대 4 판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의 다음과 같은 소수의견은 앞으로 민주진영으로부터 대법원에 쏟아질 비난의 뼈대를 짐작케 해 준다.
“올해 대통령 선거의 승자를 완전히 확실하게 파악하기는 영영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패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불편부당한 법률의 수호자로 판사들을 믿어온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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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ong@fnnews.com 송철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