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

[fn 프로 우먼―월간유아 유지영 사장] ˝아이들 생각에 늙을 틈도 없네요˝


국내 최대 유아교육 전문지 ‘월간유아’의 유지영 사장(柳知영·52)은 얼핏보면 30대 중반으로 보인다.유사장을 출가한 딸과 직장인인 아들을 둔 50대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이에 비해 유달리 젊어 보이는 유사장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늘 유아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항상 영혼이 맑은 아이들의 세계와 함께 하다보니 늙을 기회가 없다며 웃는 모습이 해맑다.

국내 최대규모의 유아교육 전문지인 월간유아의 유사장이 ‘유아’와 연을 맺게된 계기는 미국생활에서 비롯됐다.

지난 75년 남편(두산전자 이정훈 사장)이 미국지사로 발령이 나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둘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미국생활중 하루종일 집안에 덩그렇게 앉아 남편만 기다리는 일상생활이 반복되자 무료함을 느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천성을 타고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 즐거울 것 같아 미국서 유치원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77년부터 그 이듬해 9월까지 미국 ‘그로윙 가든 러서리스쿨’과 ‘비지테이션 스쿨 ’에서 유치원 교사생활을 했다. 영어가 서툴렀지만 사랑과 인내, 인간미가 묻어나는 교육이면 파란눈의 아이들과 통할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언어장벽도 두렵지 않았다고. 게다가 한국에서 중등 미술교사 자격을 갖고있던 터라 아이들과 함께하며 이들을 가르치는데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녀는 미국에서의 유치원 교사생활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됐다.아이들을 가르치고 때론 이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그녀가 발견한 또다른 기쁨이었다.

이어 81년 그녀의 남편이 서울 본사로 복귀하게 됐다. 유치원 교사생활에 미련이 남았지만 그녀는 남편을 따라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서 유아교육의 소중함을 경험한 그녀는 우리나라의 유아교육이 얼마나 취약한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미국서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국내의 유아교육은 프로그램도 없는데다 한마디로 ‘주먹구구식’이란 느낌 뿐이었다.

유아교육에 평생을 바치겠노라 마음을 굳힌 그녀는 귀국직후인 83년 서울 역삼동 집 근처에 유아들을 위한 ‘진희미술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취임했다.

우선 그녀는 유아교육의 효과를 증폭할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학원비도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받아 주변의 학부모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학원의 명성이 차츰 알려지면서 문의전화와 상담이 줄을 잇기 시작했고 인근 학원에서 견학을 오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그러나 당시로선 ‘선진기법’을 도입하면서 학원비마저 낮추자 주변 학원에서는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면서 “저 여자 뭘 안다고 설치는거야”라든가,“유아교육 좋아하시네” 라고 비난하는등 격려보다는 시기와 질투가 그녀를 괴롭혔다. 시련을 겪는 나무가 오래간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학원운영에 매진했다.

학원이 계속 번창하자 내친김에 큰 일을 해볼 생각으로 그녀는 89년 다 쓰러져 가던 월간유아를 3억원에 인수했다.

그녀는 당시 취임사에서 직원들에게 “심혈을 다하겠다”며 “ 3년 이내에 월간 유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떠나겠다”고 공약했었다.

인수 초기 광고사정은 형편없었다. 당시 200여쪽을 발간하던 월간유아는 광고 지면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광고수주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며 광고주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유아교육에 대한 확실한 신념에 광고주들이 하나둘 동조하면서 광고도 점차 늘기시작해 현재 총 600여쪽중 200여쪽을 광고로 메우게 됐다. 여성지도 아닌 유아교육 전문지로서 이정도면 상당히 성공했다는 주변의 평가도 받게됐다.

그녀는 “남편이 하는 일에 비해 나의 유아교육사업은 초라하다. 그러나 사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도 유아교육은 인류가 존재하는한 영원하다”며 유아교육사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그녀의 유아교육 철학은 매우 인간적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식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기를 쓰며 가르쳐도 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야하며, 같이 살아가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린 유아에게도 사생활이 있으며 인격체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하며 세태를 질타한다.유아기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기본이 바로 선 사람이 많아질때 세상은 밝아질 것이라는게 그녀의 믿음이다.

요즘들어 남편이 무척이나 대견해 한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출판업에 손을 대자 “뭣때문에 그런 어려운 일을 하려드느냐”고 핀잔을 주었던 남편이 요즈음엔 성원과 애정으로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됐단다.

“남편이 아이 같아요”라면서 웃어대는 그녀 옆에 조그마한 책자가 보였다. 뭔지 궁금해 슬쩍 집어들었다. 조선족 유치원 후원회를 알리는 광고전단이었다. 민망한듯 손을 내밀어 돌려달라고 했다. 한페이지짜리 전단 한켠에 ‘90년대에 들면서부터 조선족사회에 한국 열풍이 불기 시작하며 돈벌이를 위해 대도시로, 한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아, 540여개의 조선족 초·중학교가 10년사이에 220여개로 줄고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어린이들이 늘어나면서 조선족 사회가 붕괴위기에 처한 형편입니다’라고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국내 조선족 후원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사업들 중에서 사각지대인 유아교육을 위해 ‘조선족유치원후원회’를 설립,각계에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길 애타게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화려한 소개책자를 만들지 않은 까닭도 알고보면 한푼이라도 아껴 조선족 아이들을 위해 쓰겠다는 배려 때문이다. 92년부터 이 일을 해 오고 있다.

“왜 이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했다.


그녀는 “그냥 애들이 좋아서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문을 하나 했다. “기왕에 취재하려면 후원회 전화번호 좀 기사에 써달라”고 말이다. ‘조선족유치원후원회’전화번호는 (02)563-0803.

/ jongilk@fnnews.com 김종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