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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경제꽁트]마지막 노숙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0.12.31 05:34

수정 2014.11.07 11:36


이윽고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물론 TV 화면을 통해서였다. 노숙자 김씨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제 2002년이구나….”

월드컵이 열린다는 2002년, 그러나 김씨는 또다른 의미에서 깊은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노숙생활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어제 12월31일 저녁에 이 정든(?) 역전을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새해 아침에 떠나고 싶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김씨였다. 이렇듯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나서….

“어이, 김씨! 뭐하는 거야.”

귀에 익은 고함소리가 귀를 때렸다. 저만치 벽을 따라서 플라스틱 의자들이 줄줄이 놓인 쪽에는 김씨와 비슷한 심정인 동료들이 조촐하게 마지막 술자리를 펼쳐놓고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얼른 TV 앞을 떠날 수 없었다. 화면에 대통령이며 서울시장을 비롯해 눈에 익은 얼굴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종을 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종소리의 여운을 헤집고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어쩐지 잠긴 듯해서였다.

“참으로 길고 긴 한 해였습니다. 2000년 하반기부터 2001년 상반기까지 우리 사회를 휘몰아쳤던 경제위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2001년 하반기의 그 눈부신 회복 또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제유가는 하락하고 반도체 가격은 급상승하고, 야심에 찬 벤처기업들의 잇따른 세계시장 제패는 이른바 굴뚝산업의 호경기까지 몰고 오지 않았습니까… 금융권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자동차업계는 계속해서 철야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종합주가지수는 1000포인트를 바로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실업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노숙자도 사라졌습니다….”

아니지, 하고 김씨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아직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 저만치서 벌어지고 있는 술자리가 끝나야만 모두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래, 좋은 한 해였어.”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를 켜면서 김씨는 일어났다. 벌써 2년째 공사판을 전전하던 큰 아들은 재벌회사에 취직이 되었다고 알려왔다. 오는 2월에 졸업하는 작은 아들은 5000만원의 연봉을 제시받고 벌써 어느 벤처기업에 출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김씨 자신은 두어달 몸을 추스린 후에 아내와 함께 밤을 며칠씩 세워도 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체 얼마만에 찾아온 행복이란 말인가. 김씨는 천천히 술자리에 끼여들었다.

“그 테레비, 이제 지겹지도 않아?”

혀를 차는 박씨였지만 그 얼굴도 밝기만 했다. 어디 박씨 뿐이겠는가. 어제 저녁에 단체로 목욕을 하고 온 동료들의 얼굴은 모두 말끔하기만 했다. 김씨는 웃으면서 잔을 받아 들었다. 술은 여전히 소주였지만 안주는 통닭에 족발이었다.

“자, 건배하자구!”

박씨의 제의로 동료들은 모두 종이컵을 들어 올렸다.

“자! 우리의 새 출발을 위하여!”

“경제 회복을 위하여!”

“역전 광장이여, 안녕!”

“역전 파출소 김순경도 사요나라!”

모두는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정말이지 꿀맛같은 소주 한 모금이었다. 감로주가 이만할까. 루이 몇 세니 동 페리뇽이니 하는 술이 이만할까…. 하지만 모두들 희희낙락하는 가운데서도 한 사람, 장씨만이 조용하다는 것을 김씨는 곧 알아차렸다. 하기는 항상 말이 없는 편이었다. 이 역전에 나타나기는 근 1년이 되어가지만 조금은 아리송한 구석이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나이는 오십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어딘지 모르게 식자깨나 든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눈에 띄게 깔끔한 편이었다. 하기는 대학교수 출신도 있고, 중소기업 사장 정도는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 노숙자들의 면면이었지만…. 새벽이면 사라지고, 밤늦게 나타나는 그의 행적도 이상할 것이 없기는 했다. 낮이면 직장에 나가는 노숙자들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씨는 장씨에게서 늘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그는 이 마지막 술자리에까지 남아있지 않은가. 최후의 노숙자 중 하나가 된 것이었다.

“섭섭한 것도 있어. 감자국집 순자는 영영 어째보지 못하고 가는구만?”

“양복 빼입고 찾아오지, 왜?”

“여길? 아이구, 앞으로 난 전철, 기차도 안탈 거야. 아이구 몸서리야….”

와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일행들을 그저 히죽이 웃으며 바라보는 장씨에게로 김씨는 조심스럽게 다가앉았다.

“장씨는 이제 뭐할 거유?”

장씨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호한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난, 장씨가 제일 먼저 여길 떠날 줄 알았는데….”

여전한 웃음.

“여기 있던 사람들 중에 왕년에 잘 안나가던 사람 없겠지만… 장씨가 제일 형편이 낫지 않았나 싶어서… 아, 물론 내 생각이지만.”

“천만에요, 나야말로 제일 한심한 놈이지요.”

고개를 흔드는 장씨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늘 경어를 쓰는 것도 장씨만의 버릇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닥치는대로 반말을 하는 것이 이 거리의 관습이건만.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이젠 뭐할 거요?”

장씨는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윽고 대답을 해왔다.

“한 매듭은 지어졌으니?` 더 생각을 해봐야지요.”

한 매듭, 생각?` 장씨의 말은 역시 모호하기만 했다. 어쨌든 그에게는 아직 해결해야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이 아닌가.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게 혀를 차는데 박씨가 다시 잔을 채워왔다.

“자, 이젠 정말로 마지막 잔이야.”

마지막 잔?`어쩐지 콧날이 시려오는 느낌이었다. 원 샷!하는 박씨의 구호에 따라 모두는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이제 가자구.”

“다시는 보지 말아야겠지?”

어쩐지 처연해지는 마음으로 다들 악수를 나누는 사이에 장씨는 역시 말없이 남은 안주며 술병 따위를 치우고 있었다. 뭔가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하구는?`.’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에게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아내와 두 아들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닌가. 김씨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한발짝 역구내를 빠져나오는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는 것을 어쩔 수가 있었다.

역전 파출소 김순경은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새벽 순찰에 나섰다. 2002년의 첫 새벽, 역전 광장의 풍경은 조용하고 한가롭기만 했다. 술에 취해 여기저기 쓰러져 뒹굴거나 소리소리 지르면서 싸움을 벌이곤 하던 노숙자들의 모습은 이제 씻은 듯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정말이지 얼마만에 맛보는 평화인가. 역시, 하고 김순경은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는 잘 되어야 해.’

경제, 경제 하고 김순경은 발걸음에 구호를 붙이듯 중얼거려 보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그 경제라는 물건이었다. 1년 사이에, 아니 짧게는 단 몇달 사이에 거리의 풍경까지를 바꾸어놓는 경제?`. 어젯밤, TV의 송년특집에 나온 대통령은 다시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가 도래했음을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한동안 다들 쑥스럽게만 여기던 선진국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도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김순경은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고 말고.’

선진국을 바라보는 이 대한민국에 노숙자가 남아있어서야 될 말인가. 하지만 역 대합실로 들어서는 순간 김순경의 기대는 보기좋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아직도 꺼지지않은 대형 TV 앞 의자에 초라한 옷차림의 사내 하나가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옆 의자에는 소주 한병을 올려놓고. 마치 옥의 티를 발견한 느낌으로 김순경은 걸음을 빨리 해 다가갔다.

“당신은 뭐요?”

퉁명스런 물음에 사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소줏잔을 비워냈다. 그리고 비위좋게 잔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한 잔 하실라우?”

“당신은 뭐냐니까?”

“노숙잡니다. 마지막 노숙자지요.”

마지막 노숙자…. 그 말이 김순경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아저씬 끝까지 남는단 말입니까?”

“가야지요. 이제 갈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풍경을 좀 즐기고 싶었어요. 노숙자들이 사라진 이 풍경을.”

대답하는 사내의 눈가에 어쩐지 물기가 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사내는 범상치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듯도 하고…. 이 역전에서가 아니라 다른 데서 본 듯한 인상이었다. 그 것도 여러번.

“한 잔 합시다.”

이번에는 사양할 수가 없어서 김순경은 사내가 내미는 일회용 컵을 받아들었다. 천천히 잔을 비워내는 동안 사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들 고생들이 많았지요. 다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무능해서… 우리들 책임이지요. 이제 겨우 낯을 들 수 있게 됐지만….”

이 사내는 아마 중소기업 하나쯤 운영하다 망한 사람인가 보다고 김순경은 생각했다.

“날마다 여길 와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 우리들 잘못인데 어떻게 편한 잠자리에 들 수가 있으며 어떻게 기름진 식사를 할 수 있겠어요? 내 나름대로는 속죄이기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기도 하고….”

노숙을 청산하는 감회를 이해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거창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취했다고 김순경은 생각했다. 마지막 노숙자라고 해서 사고를 치지 말란 법은 없다. 김순경은 컵을 놓고 사내를 잡아일으켰다.

“자, 이제 가시지요. 차비는 있습니까?”

허허, 하고 웃으면서 사내는 김순경의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걱정 안해도 됩니다. 내 발로 갈 수 있어요.”

손을 흔들면서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노숙자의 뒷모습을 김순경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김순경은 길게 하품을 하며 무심코 TV에 눈을 주었다. 경제부처 장관 한 사람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내년의 경제전망을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늘어놓는 장관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순경은 아, 하고 낮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바로… 아까의 그 사내, 마지막 노숙자였다!

“이봐, 김씨! 그만 자고 일어나!”

누군가가 잡아흔드는 바람에 노숙자 김씨는 눈을 떴다.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꿈속에서처럼 노숙자 동료들이 모여앉아 술추렴을 하는 중이었다. 김씨는 얼른 대합실 안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제야의 종소리…. 김씨는 잔을 내미는 박씨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새해가 몇년이지?”

주먹이 먼저 머리통으로 날아왔다.

“이젠 머리까지 썩어가나? 2001년이지 뭐야!”

(끝)

/고원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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