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삽니다.오늘이 마지막인데 어떻게 만나는 사람들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모든 능력을 동원해 최선을 다합니다.그게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매출 1억달러가 넘는 반도체 관련 회사인 라이트하우스 등 6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여성 최초의 미국 공인 태권도 8단, 방송국 토크쇼 진행자,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12만평의 대저택 스타게이지의 소유자.
미국 TYK그룹의 김태연 회장(56·여)은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창출하며 이런 모습으로 금의환향했다.영어도 모른채 단돈 몇달러를 쥐고 상륙한 미국에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한지 33년만이었다.
그는 분명 조국이 버린 여자였다.그러나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다.
김회장은 ‘당신의 말처럼 정말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면 무엇이 가장 아쉬우냐’는 기자의 질문에 주저없이 ‘남북통일을 못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그는 “지구상에 같은 민족이 두 동강이 난채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이제 한국뿐”이라면서 인터뷰중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북한 관련 얘기가 나오자 김회장은 ‘김일성주석이 사망하기전인 90년대초 자신에게 실리콘밸리를 방문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털어놨다.(본지 7월28일자 2면 참조)
김회장은 이때부터 이미 북한이 정보기술(IT)산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김회장은 “당시에는 여러가지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대응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게다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IT산업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준비가 되는대로 그를 실리콘밸리에 초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더불어 앞으로 남북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뒷전에서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33년전 김회장을 버린 것은 5000년을 이어온 한국의 남녀차별 문화였다.44년 정월 초하루 태어난 그는 탄생 자체가 가문의 저주였다.아들을 대망했던 집안어른들은 조상의 산소를 찾아 빌며 눈물을 흘렸다.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같은 저주를 주느냐고.가족들의 불행이 이어졌다.결국 김회장은 68년 쫓기듯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미국 동부의 버몬트에 도착한 김회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종차별과 돈을 벌어야 하는 밑바닥 생활이었다.화장실 변기 청소부터 시작했다.접시도 닦았다.빨리 돈을 벌기 위해 주말에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단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하지만 인생의 밑바닥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솟아올랐습니다.생각해보니 그런 일이 사람들을 사귀고 영어를 배우는 훌륭한 기회였습니다.미래가 보였고 평생의 좌우명인 ‘난 할 수 있다(I can do)’ 느낌이 찾아온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
85년에는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이주, 실리콘밸리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미세한 먼지를 제거하는 클리닝시스템을 개발하는 라이트하우스를 설립했다.시행착오을 겪으며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몽땅 까먹기도 했다.다행히 회사가 집적회로나 의료기기 등 청정실의 오염방지에 필요한 모니터링시스템을 개발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성공궤도에 진입했다.95년에는 라이트하우스가 미국 100대 유망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반도체 클리룸 모니터링 부문에서 1위 차지했다.지금은 전세계에 사무소를 운영할 만큼 커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6명을 아들로, 3명을 딸로 입양했다.말이 입양이지 실제로는 주로 마약이나 알콜중독으로 방황하는 문제아들을 갱생시키면서 정이 들어 모자간의 인연을 맺게 된 경우다.이들은 현재 모두 라이트하우스를 비롯해 김회장이 이끄는 6개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김회장에게 청와대 이희호 여사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다.
“친정오는 기분으로 한번 다녀가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너무 기뻐서 ‘어머니집에 가듯 가겠습니다’하고 이번에 방한하게 됐습니다.여사께서는 저의 불우한 과거가 마치 당신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 하시면서 저를 대견해 하셨습니다.그동안의 설움이 봄눈 녹듯 녹더군요.”
김회장은 지난 25일에는 김대중 대통령 초청으로 ‘국민에게 희망을 준 사람’ 157명중의 한명으로 청와대 오찬에도 참석했다.남녀차별하는 조국은 쫓아낸 딸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김회장의 이번 방한이 관심을 모으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한국 IT산업에 상당한 투자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실제로 라이트하우스는 지난 19일 2개의 모니터로 유명한 중소업체인 탑헤드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탑헤드에 대한 지분투자는 물론, ‘탑헤드슈퍼모니터’를 전세계적으로 유통시키는데 필요한 마케팅 등 다양한 지원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밝힐 수는 없지만 70∼80여개의 업체가 투자를 요청해 오고 있습니다.어쩔땐 입장이 난처할 때가 많아요.하지만 탑헤드는 다소 달랐습니다.우선 사람들이 진실성이 있었고 제품이 좋았습니다.탑헤드슈퍼모니터를 보고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한국의 최근 IT산업에 대한 견해을 묻자 먼저 IT경영자들에게 충고부터 하고 나섰다.제발 허세를 좀 버려달라는 것이었다.수익은 없으면서 매출만 뻥뛰기 하려는 방식은 이제 지양해야 할 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IT산업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한국은 우수한 정보기술력과 뛰어난 인적자원들이 많아 성장 잠재력이 풍부합니다.실리콘밸리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이같은 잠재력을 세계시장으로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생각입니다.”
김회장은 이제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이나 회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결국 정신이고 마음입니다.힘은 바로 당신 안에 있습니다.따라서 성공 역시 이미 당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김회장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젊은이들이 자아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거대한 교육도시를 건설하는 일.김회장은 국내와 국외에서 이에 맞는 후보지를 물색중이지만 국내의 경우 각종 규제가 많아 현재 외국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생의 화려한 청장년 시절을 일과 더불어 사느라 시간이 없었을까.김회장은 뜨거운 연애를 못해 본게 아쉽다고 농담을 던지면서 활짝 웃었다.
◇김태연 회장 약력
▲56세
▲경북 김천
▲68년 미국 이민
▲68년 라이트하우스 창업
▲94년 세계무술마스터협회 그랜드마스터 인증서 수여
▲수잔 앤소니상 수상
▲토크쇼 태연김쇼 진행
▲미국 TYK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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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jjojo@fnnews.com 조형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