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변신하는재계-금호(上), 오너와 발전사] 창업2세대 형제경영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1.07.30 06:33

수정 2014.11.07 13:18


1946년 4월. 금호그룹 창업주인 고 박인천 전회장은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택시 2대를 가지고 ‘광주택시’를 설립,경영인의 길에 나선다.

일제 치하인 1929년 당시 경찰간부 시험인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고 박회장은 이때를 전후해 일본에 건너가 여러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이 50을 바라보던 그는 “광주·나주 지역에 교통수단을 마련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자본금 한푼 없이 주변 친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평소에 그의 성실함과 신용을 눈여겨 보고 있던 친지들은 두말없이 택시 2대를 마련할 자금을 갹출,지원했고 드디어 광주택시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회사는 2년 후 ‘호로가다’(트럭을 개조해 만든 구형 버스) 4대로 현 금호고속의 모태인 광주여객으로 재출범한다.

버스 운송업은 고속 성장했고 이후 금호타이어(60)와 한국합성고무(70),그리고 금호실업(72) 등이 잇달아 설립됐다.
70년대들어 전기,전자,금융,섬유,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성장을 거듭하는 와중에 창업주가 작고(84년)하고 장남인 박성용 현 명예회장이 취임, 제2의 도약기를 맞는다.

금호타이어,금호건설 등이 성장을 거듭하고 금호폴리켐,금호쉘화학,금호몬산토,금호미쓰이화학 등 세계 유수 기업들과 합작사 설립을 통해 석유화학 분야를 주도한다.

87년 한국도심공항터미널,88년에는 아시아나 항공과 아시아나공항을 설립해 복수 민항시대를 열었다. 90년대 들어서는 한국복합화물터미널,금호특송,금호 Hertz를 설립해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창업주는 이순정 여사와의 사이에 5남3녀를 두었다. 지난 96년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은 차남 박정구 회장은 IMF라는 위기를 맞았으나 과감한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으로 지난 99년 그룹 창업 이래 최대 흑자를 실현했다. 3남 삼구씨는 아시아나 항공 부회장,막내인 찬구씨는 금호석유화학 사장과 그룹비전 경영실 사장을 겸임하며 미래의 CEO로서 훈련을 쌓고 있다. 5남 종구씨는 아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출신으로 현정부에서 공공관리단장을 맡고 있다.

금호는 형제간 승계를 통해 경영권 이양을 이룬 첫 대기업. 박성용 명예회장은 자신의 회장 취임 초기 형제들을 모아놓고 ‘창업자산의 공동분배’ ‘개인사업 불가’ ‘신규 사업은 4형제 공동 지분으로 추진’ 등의 원칙을 세우고 4형제는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문화를 아는 엘리트 CEO,박성용 명예회장=박성용 명예회장(69)에게는 ‘엘리트 CEO’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서울대 문리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경제학 석사,예일대 경제학 박사, 65년부터 68년까지 미국 버클리 대학 등에서 경제학과 조교수,71년부터 4년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등 화려한 경력이 이를 입증한다.

그가 선친의 뜻을 받들어 경영인으로 변신한 것은 지난 74년. 당시 금호실업 사장을 시작으로 79년 그룹 부회장을 거쳐 지난 84년 회장에 취임한다. 96년 명예회장으로 그룹 경영에서 한발짝 물러날 때까지 뛰어난 경영능력으로 금호타이어를 세계 10대 타이어 메이커로, 금호석유화학을 세계 7위의 합성고무업체로 만들었다.

60년대 말 박 명예회장은 “곧 컬러 TV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전문 생산업체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주위에서는 의아해 했지만 결국 금호전자라는 컬러 TV전문생산업체가 만들어졌다. 이 시도는 컬러 방송의 시작이 연기되며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그가 보여준 판단력과 추진력은 지금도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문화 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은퇴 후 금호 현악4중주단과 함께 국내외 공연을 다니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다.

△통 큰 CEO, 박정구 회장=박정구 금호그룹 회장(64)은 지난 60년 4형제 중 가장 먼저 그룹에 입사했고 72년 광주고속 대표이사를 시작으로 81년 금호타이어 대표,85년 금호건설 대표,90년 그룹 부회장을 거쳐 96년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인정이 많아 부하직원이 잘 따르는 스타일. 대학(연세대 법학과) 졸업후 40여년을 그룹 경영에 참여해 풍부한 현장경험을 가진 것이 최대 장점이며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치우는 추진력도 갖춘 인물.

회장 취임과 함께 ‘비전경영’을 선포,2000년대 재계 5위권 진입(현재 자산규모로 9위)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 81년 적자투성이던 금호타이어 사장을 맡아 2년만에 매출 1579억원,순이익 120억원의 그룹 주력기업으로 키워내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지난 84년 일본의 권위있는 기업인상인 ‘이글클럽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90년대 초부터 금호고속의 세계화를 추진,96년 국내 운수업계 최초로 중국 무한과 심천, 성도 등지에서 고속버스 운행을 시작했다. 아시아나항공을 국제 항공사로 키웠고 금호타이어 중국진출 및 미국 현지연구소 설립 등이 모두 그의 업적. 컴퓨터에 능통해 사내 통신망인 ‘텔레피아’를 통해 결재서류를 챙기고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그는 가식없고 소탈한 성격에다 영어와 일어를 별 어려움없이 구사하한다. 좌우명은 ‘의(義)가 아닌 것은 취하지 않는다’. 등산을 즐기며 골프도 핸디 10의 수준급.

부회장 재직시 그룹의 신규 해외투자를 의욕적으로 실행, 금호타이어 중국진출 및 미국 현지 연구소 설립, 금호건설의 베트남 진출을 실현했다. 맏형인 박성용 명예회장처럼 문화·예술 마인드가 뛰어났고 스포츠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74년 전남축구협회장,80년 대한궁도협회장,82년 한국올림픽조직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고 국민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했다.

△고용 증대를 통한 사회기여,박삼구 아시아나항공 부회장=3남인 박삼구 아시아나항공 부회장은 67년 대학 졸업 후 그룹에 입사해 금호실업 전무,(주)금호 사장을 거치며 일찍부터 경영수업을 쌓았다. 91년 아시아나항공 사장을 맡은 이후 현재까지 항공운송 분야에서 한우물을 파고 있다.

사업 초기 대규모 시설투자로 경영상의 어려움이 클 것으로 예상된 아시아나항공을 짧은 시간내 흑자로 전환시킨 주인공으로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말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박 부회장은 경제학(연세대)을 전공해서인지 수치에 밝고 치밀한 성격.

그의 경영철학은 ‘합리성에 기반한 경영’과 ‘고용증대를 통한 사회기여’로 늘 “기업경영시 온정주의와 적당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경영이 이뤄져야 기업체질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

박 부회장은 “창업 초기 대한항공 출신들이 많이 합류해서 독점기업이 갖기 쉬운 관료주의를 배격하고 격의없는 조직문화를 가꾸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질적 직종 간 시스템 조화와 기동성을 위해 ‘한템포 빨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도입한 박 부회장은 “기업인으로서의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은 고용창출”이라고 강조한다. 매달 가장 기분 좋은 날이 입사식 날이라는 그는 신입사원 교육 수료식에 반드시 참석해 회사경영방침을 설명하는 등 함께 시간을 보낸다.

△ 차세대 그룹 리더,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막내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은 대학 졸업 후 현 금호석유화학의 전신인 한국합성고무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줄곧 금호석유화학, 금호몬산토 등 유화 쪽에 몸담아 왔다.차분하면서도 치밀하며 빈틈이 없는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초부터 금호석유화학 사장도 겸직해 운신의 폭을 넓혔다.

박사장은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그룹 내 재무 부문을 이끌고 있다.
다른 그룹의 구조조정본부에 해당하는 비전경영실 사장을 겸임하며 중장기 경영계획수립과 구조조정 추진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특히 금호석유화학을 통해 바이오산업 등 성장산업 진출을 적극 추진하는 등 금호그룹의 미래를 그려가는 중책을 맡고 있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4형제 중 그룹 내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인물”이라며 “현재 그룹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은 모두 그의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 jerry@fnnews.com 김종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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