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기업 소설-에덴의 북쪽] 절벽 앞에서 ⑨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05 09:28

수정 2014.11.07 17:48


“야, 인마, 너 해냈구나. 해냈어!”

강선우가 녀석을 허공에 휘뚱 들어올린다.

“삼촌, 나 한다면 하는 놈 아뇨?”

“그래, 이 괴물아!”

정말 괴물이 아니고서는, 그런 기적을 일궈낼 수가 없다. 조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웅철이 녀석만큼 멋있고 아름다운 청년은 없는 것 같다.

김판수 회장 비서실 김과장이 차를 몰고 운동장까지 찾아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다. 김과장은 강선우가 덕양공단에서 서울 본사로 옮겨오기 전부터 교류가 있는, 유일한 대학 직계 후배다.

같은 후배인 주석민에게 두회 선배니까, 강선우에게는 2년차 후배인 셈이다.
특별히 장호림 교수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았던 유망주다.

일찍이 김판수 회장 비서실에 근무하게 된 것도 그런 인연이 아닌가싶다. 오늘 아침, 그러니까 오종근 사장에게 사직원을 내기 전에 커피를 같이 마시며 김판수 회장의 귀국에 대한 제반 업무를 논의했으므로, 그가 운동장까지 차를 몰고 찾아온 사실이 하등 놀라울 까닭은 없다.

김과장은 차를 세우자마자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강선우 쪽으로 냅다 달려온다.

“선배님, 선배님! 왜 휴대폰도 안 받고 그래요?”

“지금, 휴대폰 받게 생겼어?”

강선우는 흥분한 상태지만 그쪽은 다르다. 그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배님, 나 좀 봐요. 어서요.”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글쎄, 조용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요.”

“의논도 좋지만, 이봐. 우리가 비겼어! 우리 동남 오합지졸이 우승 후보 백제대와 비겼다니까, 이거 기적 아냐? 이건 진짜로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라구!”

“선배님!”

김과장이 더 못참겠다는 듯이 선수들과 엉겨 있는 강선우를 강제로 끌고 나온다.

“급해요, 급한 일이 생겼다구요.”

“급한 일?”

“그래요, 아주 시급한 일이에요.”

김과장은 운동장 구석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억지로 강선우를 밀어넣고, 문을 잠근다. 그가 입을 연다.

“선배님, 조국환 부회장이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해외로 도피했다구?”

“오늘 오전에 출국금지 조치가 떨어졌는데, 그 조치가 떨어지기 한시간 전에 비행기를 탔습니다.”

“어디로 가는 비행기를 탄 거야?”

“홍콩이오. 하지만 홍콩은 경유지에 불과할 겁니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은데… 문제는 조부회장을 수행하고 나간 동행잡니다.”

“동행자?”

“그게 누군지 아세요?”

“가족들이겠지, 어제 아들도 귀국했잖아.”

김과장이 고개를 절절 흔든다.

“전혀 핀이 안 맞네요.”

“핀이 안 맞아? 그럼 누구야?”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세요.”

“글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비서실의 주혜경 과장입니다.”

순간 강선우는 입을 봉하고 만다. 흡사 담뱃불 만난 애벌레처럼 화들짝 놀라 방방 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왜, 놀라지 않죠?”

하고 도리어 김과장 쪽에서 묻는다.

“놀라긴 왜 놀라?”

강선우는 침착하다. 그가 말을 잇는다.


“주혜경 과장, 김판수 회장 비서실로 옮기기 전에 조부회장님을 오래 모셨잖아. 그런 의리 때문에 수행을 자청했겠지 뭐.”

“이건 의리가 아닙니다.”

“의리가 아니면 뭐야?”

“애정 도피 행각입니다.


“애정 도피? 뭘 근거로 누가 그 따위 헛소릴 하는 거야?”

강선우가 나무라듯 추궁한다.

“원래 선배님하고 주혜경 과장하고 무슨 일이 날 것 같다는 얘기가 분분했거든요. 주혜경 과장 입으로도 그런 암시를 했었구요. 더구나 선배님이 디트로이트에서 보낸 시슬렌가요? 그 유명한 그림 때문에 그 스캔들이 구체화될 뻔했죠. 결국 설로 끝나고 말았지만….”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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