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신용불량’ 권하는 사회

임관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05 09:29

수정 2014.11.07 17:47


최근 비가 내리는 주말이 잦았지만 어린이날 연휴만은 날씨도 심술을 부리지 않아 어린이들에게는 신나는 날이었다.

어린이날 추억중에 잊어져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이날 전후로 연중행사처럼 벌어졌던 불량식품 일제 단속이다. 언제부터 자취를 감췄는지 모르지만, 요즈음은 그런 용어 자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용어를 쓰는 부모들도 거의 없다.

유명 패스트푸드점들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량식품의 설 자리가 없어진 것 같다. 그만큼 우리네 먹거리가 다양해지고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억지로 단속을 해도 잘 잡히지 않았던 불량식품업체들이 식생활 수준 향상으로 외면당하면서 시장원리에 의해 떼밀려 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장원리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런데 또 다시 ‘불량’으로 나라 전체가 시끄럽다. 예전에는 어린이를 상대로 한 불량식품이 말썽이더니 요즈음은 어른들의 ‘신용불량’이 문제다. 신용불량문제는 경제문제를 뛰어넘어 사회문제로까지 확산되며 지난 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악재로 부상하고 있다.

은행연합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월말 현재 신용불량자 수는 30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국민 10명중 1명꼴로 금융기관서 빌린 빚을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갚는다는 얘기다. 경제활동인구로 따지면 더욱 심각해진다. 2001년 기준 경제활동인구가 2200만명이니 7명중 1명은 신용불량자인 셈이다.

연체율 급증에 따른 신용불량은 카드채권 대란이라는 제1막으로 가공할 위력을 보여줬다. 카드채 문제가 정부의 ‘특별대책’으로 외견상 진정됐지만 어느 누구도 시장불안이 해소됐다고 믿지는 않는다. 정부의 특별대책이 미봉책이기 때문이다. 6월까지 돌아오는 만기채권 11조원에 대해 절반은 만기를 연장하고 절반은 카드채권기금으로 사들였지만 한시적 대책일 뿐이다. 6월까지는 시간을 벌어놨지만 자생적으로 카드사들이 회생발판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90조원에 이르는 카드채권은 임시로 틀어막은 부분까지 가세하며 시장에 더 큰 충격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

시장을 무시한 대응은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정부의 카드채 특별대책에 대해 외국투자가들이 모두 반대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얼마 전 정부가 신용불량자의 회생을 위해 봉급생활자나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개인사업자를 대상으로 금융기관의 신규대출를 허용하겠다는 내용을 밝힌 적이 있다. 또한 신용회복 특별조치법을 마련해 체계적으로 구제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이런 방안들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잘 봐 줘도 이것은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이 아니다. 신용불량자의 구제가 쉽게 된다는 것은 역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는 길도 쉽다는 말이다. 만약 누구나 쉽게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용제도에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 점부터 개선해야 한다. 만약 신용제도에 이런 문제점이 없는데도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어서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에게 신규대출을 허용한다는 것은 병의 원인은 치료하지 않고 생명만을 더 연장하기 위해 수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카드의 무분별한 발급, 경제능력이 있건 없건 카드를 만들어 주는 것도 문제지만 사고를 치고 신용불량자가 돼도 정부의 대책 하나로 사면을 받을 수 있다면 신용불량은 수치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구태가 국내시장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를 갉아먹는 제일 큰 요인이다.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시장질서를 외국인은 의아하게 보고 있다.

이라크전쟁의 조기종전으로 미국증시는 연일 상승세를 타며 다우지수 8500, 나스닥지수 1500포인트를 돌파하며 종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내증시는 SK글로벌과 카드채 사태, 연체율 급증, 북한핵문제 등으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외국인은 올들어 1조7000억원 이상 팔아치우며 대만과 다른 신흥국가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국내증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 위기대책은 위기가 왔을 때 만들 것이 아니라 태평할 때 미리미리 만들어둬야 한다.
그래야 비용도 줄이고 충격도 줄일 수 있다. 제도는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시장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다.
시장은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제일의 육성책임을 생각해야 할 때다.

/임관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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