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콜금리 인하’ 딜레마

이장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07 09:29

수정 2014.11.07 17:45


지난달 30일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5월중 금리인하를 시사하는 발언을 하자 한은 홈페이지에는 이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항의가 들끓었다. 그동안 금리인하 효과에 부정적이던 박총재의 경기인식이 갑자기 180도 돌아선데 대한 비판도 나왔지만 네티즌들의 우려는 금리인하가 부동산 투기 열풍에 불을 지필 것이란 데 집중됐다.

이후 불행히도 그 같은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분양가만 5억원에 달하는 서울 도곡 1차 동시분양에 실수요자, 투기꾼 가릴 것없이 청약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고, 서초 송파 등 강남지역 아파트 매물은 자취를 감춘 채 매도호가가 1000만원가량 급등했다고 한다. 저금리시대에 부동산을 능가할 투자대상은 없을 것이라며 개발예정지역에 땅 투자를 부추기는 중개업소의 전화공세가 투자심리를 불안하게 한다. 전국토 가운데 주거가능면적의 절반가량이 투기지역으로 지정되고, 서울시내 아파트 평당가격이 2년 사이에 668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50% 가까이 급등할 정도로 기승을 부리다 잠잠해지던 투기 불꽃이 금리인하 바람을 타고 다시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다.


당초 경기부양을 의도했던 긍정적 시그널은 온데간데없고 금리인하 이후의 후유증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만 대두되는 상황이다. 금융시장에서는 콜금리인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분위기로 인하효과는 이미 시장에 반영됐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모 애널리스트는 “콜금리 인하를 통한 실물경제 부양효과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되나 금리인하 기대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지 않을 경우 부정적 충격이 훨씬 커 보인다”는 보고서를 냈다. 한은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콜금리 인하를 통한 내수경기 회복이 적절한 조치라는 긍정적인 분석도 없지 않지만 저금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훨씬 높은 편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우선 시장참가자들은 현재 경제의 문제점이 금리보다는 정부 정책의 신뢰여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이런 저런 명분으로 깨지고, 정부가 직접 나서야 노사간 중재가 이뤄지는 현실에서 금리인하만으로 투자증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은행장의 임기는 존중될 뿐 보장되지는 않는 현실에서 금융시스템이 활발하게 작동하기도 기대하기 어렵다. 시장을 중시하겠다는 참여정부의 경제철학도 현실에선 신관치금융으로 변질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이 금리조정에 꿈쩍하지 않는것은 당연하다. 현재 기업들이 금리가 높아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회복이 선행되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야 경기진작이라는 금리인하의 긍정적 효과가 빛을 발할 것이다.

경제논리가 내년 4월 총선을 앞세운 정치논리에 뒷전으로 밀릴지도 모른다는 시장참가자들의 우려도 시장왜곡의 한 요인이 된다. 정부가 부동산투기에 위기감을 느끼고 강공드라이브를 펴고 있지만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은 이미 총선을 1년 앞둔 정부가 취할 경제대책을 이미 읽고 있다. 골프장, 스키장 인허가규제를 대폭 풀기로 한 것과 수도권내 공장증설 허용, 2개 신도시 건설 등 최근 정부정책의 일맥을 상통하는 것은 부동산 활성화를 통한 경기 부양이다. 사실 부동산활성화만큼 직접적이고 파급효과가 큰 경기대책이 없다는 게 경제전문가의 평가이고 보면 내년 총선 때까지는 정부가 고강도 아파트값 억제책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땅값 상승 등 불로소득 차단을 통한 건전한 성장과 공평한 분배가 총선이라는 정치일정에 휘둘리고 있는 형국이다.

경기부양을 위한 금리인하로 방향을 선회한 한은의 고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남대문시장을 돌아본 금융통화운용위원들은 상인들로부터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까지 비난을 받았고 재계와 정부로부터 금리를 내리라는 유형, 무형의 압력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금융당국자들이 되짚어야 할 것은 이번 경기침체의 시작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 외신이 ‘카드로 지은 집’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최근 2∼3년간 한국경제는 카드 과소비와 가계대출 등 거품에 의존한 성장을 이뤘다. 지금의 경기침체는 거품이 빠지는 과정이고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다.


현재 상황이 고통스럽다고, 내년 총선이 임박했다고, 경제성장률이라는 수치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성장을 위해 부동산경기 부양을 택한 DJ정부가 집없는 서민층과 노동자들에게 절망을 안겨준 전철을 되밟아선 더더욱 안된다.


섣부른 금리인하와 경기부양은 결국 현재 정부의 지지계층인 서민과 노동자의 내집마련 꿈을 멀게 하고 이들을 울릴 뿐이다.

/이장규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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