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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韓·美 정상회담을 앞두고

최승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08 09:29

수정 2014.11.07 17:44


요즘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한국인들이 준비하는 대답 하나가 있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전쟁을 하면 당신은 어느 쪽을 위해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심사과정에서 느닷없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반미기류가 미국에 보도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이 말은 그동안 미국인들의 불편한 시각과 재미 한국인들의 불안한 마음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다.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미국인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당연히 질문해 올 것이다. 북한핵문제를 둘러싼 “한·미 동맹이 우선이냐, 민족 공조가 우선이냐”에 대한 대답을 요구할 게 분명하다. 이미 화두가 되어 있는, 아주 단순해 초등학교 수준의 이분법적 질문이지만 국가 최고책임자로서의 답변은 그리 만만치 않다.


명쾌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고 외교적 수사로 치장된 애매한 답변을 한다면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난해한 질문이기도 하다. 대통령 당선 자체가 반미 감정에 편승해 이루어진 것이고, 노대통령 지지자들은 반미 성향이 강한 것으로 그동안 판단해 왔다. 이런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말을 꺼낸다면 아주 불편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2년 전 노벨평화상도 받고 한창 잘나가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하다. 당시 햇볕정책을 설명하며 북한의 입장을 이해시키려던 김대통령에게 “김정일에 회의적”이라는 단 한마디로 모든 내용을 뒤집은 것이 바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다.

그는 북한 정권에 대해 자기 국민들의 밥도 책임지지 못하는 한심한 독재 집단으로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해 북한 주민은 물론 남한 주민들을 볼모로 잡고 벼랑에서 큰 소리치고 있는 수준으로 현사태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미국의 입장이 지금 명확하지 않다는 데에 노대통령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일견 매파와 비둘기파가 노선 경쟁을 벌이고 있고, 이라크전쟁의 승리를 천천히 즐기며 시간을 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일본과 대만의 핵무장을 언급하며 중국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면서, 다음 대선을 앞두고 어떤 것이 재선으로 가는 길인지 느긋하게 저울질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 미국이 감추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하지만 실은 그것도 쉽지가 않다.

개인적으로는 평양 정권의 붕괴를 희망하지만 지금은 어떤 길도 정확하게 선택하지 않은 채 관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번에는 전쟁 대신에 자신의 외교력을 국민과 전세계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벼랑 끝 성명이 수위를 높여가고, 중국의 역할이 벽에 부딪히는 데다가, 이라크전쟁 승리의 약발이 떨어지면, 매파의 입지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정상회담으로 쌓인 현안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모두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과거 노대통령이 후보시절 “사진 찍기 위해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고 공언했다지만 지금은 사진만 찍고 몇 가지 영양가 없는 원론적인 기념품(말)만을 주고받은 뒤 돌아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노대통령의 역량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정치 상황이 당장에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 입장에서도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자신의 진로에 족쇄를 채우는 일은 피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코너에 몰린 북한은 강경하고, 출구를 막은 미국은 수읽기에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데에 지금 새 정부의 고민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50년 혈맹인 미국과의 우정을 강조해야 한다. 그런 한·미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밝힌 뒤 핵무기의 직접 피해 당사자가 바로 한국이고, 누구보다 한반도 비핵화를 염원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핵무기의 꿈을 버리게 하기 위한 공조 방안에 대해 논의, 부시 대통령이 외교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선에서 우선 만족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노대통령은 명확하고 믿을만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또 동년배의 지도자끼리 개인적으로 친분을 다지며 서로의 코드를 맞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방미의 정치적인 목표를 낮은 곳에 잡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여야 낭패 보는 일이 없다.
만약 깜짝쇼를 기대하다가 이견이나 불거진다면 함께 간 경제팀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미국 정부와 잡음을 일으키는 처지에 미국 기업인들을 붙들고 ‘주식회사 한국에 투자하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북한핵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 제시조차 없는 자금의 유치란, 돈을 내놓는 입장에서 뒤집어서 보자면 ‘벼랑끝 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양헌석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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