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 시론] 군사·경제력이 문화 지킨다

주장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5.13 09:31

수정 2014.11.07 17:41


걸프전 발발 몇해 전인 88년 5월.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본산지 바빌론의 유적복구에 정열적으로 몰두하던 때였다. 당시, 필자는 바그다드에서 그의 장남 우다이를 만난 적이 있다. 우다이는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다이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많지만 필자가 만났을 때 인상은 수줍음을 타는 내성적 성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우다이는 이라크 스포츠진흥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자연 우리는 이라크 스포츠진흥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도중 필자가 설형문자와 바벨탑 등에 대해 관심을 표하자 갑자기 자부심에 찬 어조로 자신의 부친이 고대 바빌론의 전설적 영웅 느부갓네살 왕의 유적 복원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러면서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문화유산보호정책에 관해 각별한 관심과 흥미를 보이며 이것저것 물었다.

필자는 드골 집권기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문화유산보호법제정과 당시 미테랑 정부와 자크 랑 장관의 노력으로 매년 문화부 예산이 증액되고 있다는 사실 등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이라크인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유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태까지 방치해 놓았었는데, 78년부터 부친이 복원계획을 세워 86년부터 본격적인 복구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자국의 문화유산보호정책에 대해 매우 자긍심어린 태도를 보였다.

그로부터 15년 후, 91년 걸프전과 얼마 전 끝난 이라크전으로 이라크 내 수많은 세계적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도굴당했으며 그 문화재가 해외로 빠져나가 대부분 미국, 영국 등 전쟁 당사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을 때, 필자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비록 사담 후세인의 유적복구사업이 역사적으로 유대왕국을 제압하고 시리아, 요르단, 쿠웨이트 지역을 장악했던 느부갓네살 왕과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중동지역의 맹주로 군림하려는 야망을 가진 자신을 상징적으로 동일시하여 상승효과를 얻으려는 불순(?)하고 계산된 의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노력으로 복원된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전쟁으로 인해 대량 파괴되고 소멸되었다는 사실만은 인류전체의 손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도 수많은 외적의 침입 또는 내란에 의해 귀중한 역사적 유산들이 파괴되고 소실된 바 있다. 그렇게 이미 사라진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현존하는 우리의 문화재라도 제대로 보존하여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것은 우리만의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의 당위성과 전쟁의 개연성이 항상 대립하며 불안정하게 공존하는 국제사회에서 무력충돌시를 대비하여 ‘헤이그 협정’처럼 인류의 문화유산인 각국의 문화재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협약 등에 가입해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이번 이라크전을 통해 절감했듯이 군사력과 기술력 및 경제력 없이는 외침으로부터 자국의 국권은 물론 문화유산 또한 제대로 수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강화해나가는 국가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또한 문화유산보호를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과 자국의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제대로 보호하여 자손에게 온전하게 전수하려는 성숙된 국민 의식과 의지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이라크전에서 시민들의 약탈로 황폐해진 이라크 국립박물관의 모습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았다. 물론 이 경우 전시라는 특수상황이었음을 참작할 수 있다고 하자. 반면에 어제 오늘이 아닌 우리나라의 문화재 훼손과 도굴사건들은 그 어떤 변명의 여지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되는 국내 역사적 유물의 도굴 및 도난사건과 최근 묘지 앞 석물들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과연 우리가 스스로 문화국민임을 자처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게 된다.

15년 전 우다이가 한국이 아닌 프랑스의 문화유산보호정책에 관심을 표명했을 때 슬며시 느꼈던 수치심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아직까지 한국의 문화유산보호를 위한 정부정책이나 국민의 의식수준에 별다른 가시적 변화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머지않은 장래에 해외에서 외국인을 만나게 됐을 때, 필자가 유학했던 프랑스가 아닌 조국 대한민국의 문화유산보호정책과 성숙된 문화국민 한국인에 대한 질문을 받게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새로운 각오와 의욕으로 출범한 새 정부에 희망과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명애 소설가·불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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