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출판

[우리말 클리닉] 태어나서 죽고… 언어는 생명체다

김재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6.04 09:37

수정 2014.11.07 17:16


말은 변한다. 생명체처럼 태어나서 널리 퍼진다. 맨처음 뜻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하며, 때때로 영영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말은 한글맞춤법, 표준어규정, 외래어표기법 등 어법에 따라 적는다. 우리말의 변화를 정리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끄는 것이 어법이다. 우리말에서 으뜸가는 법칙은 두음법칙이나 구개음화, 모음조화 같은 것들이 아니다.
오로지 많은 사람들이 익혀 휘뚜루 쓰는 ‘다수의 법칙’에 따라 발전해 오고 있다.

어법을 먼저 만들어 놓고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쓰이는 말을 정리한 것이 어법이다. 새롭게 태어난 말이 널리 퍼져 이른바 ‘사회성’을 갖추게 되면 사전에도 오르는 어엿한 우리말로 자리잡게 된다. 말로 태어나 글로 존재를 확인받게 되는 셈이다.

신문사의 교열기자는 어법에 따라 기사를 다듬는 일을 한다. 학자들이 연구해 정리한 어법을 잣대로 삼아 현장의 기사를 실시간대로 다룬다. 급변하는 오늘의 세계를 아우르는 기사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이 등장한다. 또 특수분야의 전문용어가 일반적인 사회현상을 빗대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최근 나타나 널리 쓰이는 대표적인 말로 ‘사스’를 들 수 있겠다. 처음엔 ‘괴질(怪疾)’로 불리다가 증세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의 약자 ‘사스(SARS)’로 정리됐다.

또 어떤 일이 시간적으로 매우 절박한 상태임을 뜻하는 말인 ‘초읽기’는 우주선 발사나 권투경기에서 카운트다운 형태로 등장하지만 프로기사 대국 때 시간을 재는 전문용어로 뿌리내린 말이다. 프로기사의 대국은 1∼6시간의 다양한 시간제한이 있다. 제한시간을 모두 소비한 기사가 ‘초읽기’에 몰리는 마지막 상황은 대개 비슷하다. 대국 규정에 따라 마지막 30초나 1분 안에 다음수를 두지 않으면 시간패를 당하게 된다. 마지막 10초 때 계시원이 “하나 둘 셋…”하며 수를 세다가 열까지 가면 무조건 지는 긴박한 상황인 것이다.

교열기자는 보수를 지향하는 어법과 변화를 시도하는 새로운 말 사이에서 고민한다.
‘먹을 수 있는 온갖 것’이란 의미의 ‘먹을거리’는 요즘 흔히 ‘먹거리’로 쓰인다. 사전을 찾아보면 아직 ‘먹거리’는 ‘먹을거리의 잘못’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먹거리’라는 말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활개를 치며 나댄다.
볼거리, 쓸거리처럼 석자로 줄여쓰는 것이 간편해서 먹거리를 선호하는 것일까. ‘읽을거리’를 ‘읽거리’라고 우기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보다.

/ leciel98@fnnews.com 김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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