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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獨 재정정책 패러다임의 전환


독일 연방정부는 기존의 긴축적 재정정책 노선과 은밀한 작별을 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경기부양을 위한 세제개혁이다. 한스 아이헬 독일 재무장관은 2005년으로 예정된 3단계 세제개혁을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겨 시행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물론, 그는 몇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첫째 2004년 연방예산안이 합헌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수준에서 150억유로가량이 절약돼야 한다. 둘째는 국가보조금 및 세금혜택의 대폭적인 삭감이다. 아이헬 장관은 야당이 국가보조금 문제에 동의하는 경우, 세제개혁 조기시행의 기회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제개혁은 지난 99년 적록연맹 정부에 의해 확정돼, 99년부터 2005년까지 3단계에 걸친 소득세율 인하 및 면세점의 상향조정을 규정하고 있다. 당초 개혁안에 따라 2∼3단계 세제개혁이 2003년, 2004년에 각각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지난해 홍수복구자금 마련을 위해 1년 연기됐었다. 2∼3단계 세제개혁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에 최저세율은 현행 19.9%에서 15%로, 최고세율은 48.5%에서 42%로 각각 인하되며 면세점은 현행 연소득 6322유로에서 7664유로로 높아지게 된다. 이에따라 가계의 세금부담은 약 252억유로 경감돼 그만큼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증가할 전망이다.

아이헬 장관은 초지일관 ‘재정 건전화’를 추구해왔으며, 이로인해 ‘긴축장관’이란 별명까지 갖게 됐다. 슈뢰더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추진돼온 아이헬 장관의 긴축 재정정책은 ‘빚은 곧 미래의 비용’,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을 위해서는 재정건전화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유로존의 안정성장 협약에 깔려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같은 정책노선은 경제부문에서의 국가 개입 축소라는 원칙과 연계돼 해석되면서 궁극적으로 성장약화, 고실업 등의 구조적 문제는 미시정책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아이헬 장관의 제안은 여러 면에서 정책전환을 보이고 있다. 경기의 자동적 안정화장치(세수감소와 초과지출 감수)가 작동하도록 할뿐 아니라 성장자극을 위해 추가 적자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책전환의 고려에는 무엇보다도 세계경제가 3년간 경기침체에 빠져 있고, 특히 독일경제의 경우 디플레이션 전단계 국면에 있다는 인식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최근 IMF는 독일경제가 ‘완만한 디플레이션’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디플레이션 방지를 위해서는 더욱 능동적이며 기존 형식에서 벗어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디플레이션 우려는 독일의 인플레이션율이 현재 0.7%를 기록하고 있을뿐 아니라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에 불거졌다. 가격지수 측정의 오차를 고려할 경우 실질 인플레이션율은 거의 제로 이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학자나 정책담당자들은 독일경제가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고, 최근 경제지수로부터 독일경제의 디플레이션을 추론하기는 어렵다는데 대부분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독일 경제성장의 둔화가 지속될 경우, 경제주체들은 더욱 디플레이션 시나리오에 매달리게 되고, 이에따라 국민경제 마비가 더욱 장기화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정부는 경기침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미시정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거시정책을 통한 내수시장 활성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아이헬 장관의 정책전환이 갖는 의미는 세제개혁 조기시행을 통한 유효소비 증대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재정정책의 활성화는 시장경제의 내재적 자기강화 경향을 완화시키고 이를 통해 경제주체의 기대를 안정화시킨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함부르크 세계경제 문서국의 슈트라브하르 국장은 “세제개혁 조기시행은 심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정책”이라며 아이헬 장관의 조치를 옹호하고 있다.

정책전환이 이뤄질 경우 최대 희생자는 물론 유로지역의 안정성장 협약이다. 세제개혁이 조기 시행될 경우, 내년 역시 예산적자 제한 3%를 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슈뢰더 총리는 “독일정부는 ‘가능한한’ 성장안정 협약 규정을 준수할 것”이라면서 안정성장 협약의 의미를 상대화한 바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000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3년간의 경기침체는 유럽국가의 재정정책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재정건전화는 성장 및 고용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지만 경기 사이클을 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구돼야 할 것이다.

/박경순 베를린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