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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년 最古은행 ‘조흥’ 역사 뒤안길로]민족금융 성장이끈 ‘큰 거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6.20 09:41

수정 2014.11.07 16:40


106년 역사의 우리나라 최고(最古) 은행인 조흥은행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지난 19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신한금융지주회사로의 매각을 최종 결정함에 따라 1세기가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조흥은행 간판이 내려질 운명에 처했다.

1897년 창립된 조흥은행은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시중은행 순위를 매길 때면 ‘조(조흥은행), 상(상업은행), 제(제일은행), 한(한일은행), 서(서울은행)’로 항상 은행권 서열의 선두를 지켰지만 결국 그 자리를 후발주자에게 내준채 쓸쓸한 퇴장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한성은행이 모태=조흥은행의 뿌리인 한성은행은 지난 1897년 일본계 자본으로부터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해 뜻있는 고위관료들과 실업계 인사들의 돈을 모아 세워졌다.

창립초기 일본계 은행에 밀려 고전하다 1920년대 초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여파로 은행 경영에 큰 타격을 받았지만 1942년 고질적이었던 연체 대출금 상각을 완료하면서 재도약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 민족계 은행인 경상합동은행과 동일은행 인수를 계기로 행명을 조흥은행으로 바꿨다.

해방 이후 조흥은행은 지난 1956년 국내 기업가운데 최초로 증시에 상장됐다. 조흥은행 종목코드가 ‘00010’인 것도 이 때문이다.


◇장영자 사건에서 공적자금 투입까지=지난 1961∼1979년 산업자금의 공급원으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며 승승장구하던 조흥은행에도 80년대 들어 어려움이 닥쳤다.

지난 1982년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 편취 사건, 1983년 영동개발진흥 어음 부정 지급보증 사고 등 줄줄이 이어진 악재로 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위기도 아니었다. 조흥은행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은 것은 창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97년 이후. 1997년 2월 한보 사태, 3월 삼미그룹 도산, 7월 기아그룹 부도 등의 잇따른 악재로 큰 타격을 입었고 그해 12월에는 외환위기로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받은 공적자금 2조7000억원이 조흥은행 매각의 단초가 될 줄은 당시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조흥은행 한 임원은 “차라리 그때 넉넉하게 5조원 정도의 자금을 지원받았더라면 경영정상화가 더 빨리 진행됐을 것”이라고 당시를 소회했다.

◇뒤바뀐 운명=은행권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지난 98년 조흥은행은 신한은행과의 합병을 시도했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는 조흥은행 경영진에게 10월말까지 다른 은행과 합병하거나 외자를 끌어오지 못하면 강제 합병시키겠다고 통보했다. 그때 장철훈 조흥은행장은 라응찬 당시 신한은행장(현 신한지주 회장)을 만나 합병의사를 물었다. 전산시스템도 같고 조흥 출신이 많다는 점에서 신한과의 합병이 가장 현실성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행장은 대주주 입장을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표면적으로는 대주주인 재일동포 반대 때문이었지만 신한은행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합병이후엔 결국 조흥은행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가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허무하게 끝난 홀로서기=신한은행과의 합병에 실패한 조흥은행은 금감위 주도하에 1999년 3월 충북은행, 9월에는 현대강원은행과 합병했다.

2000년 흑자전환하며 안정의 기미를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대우 사태와 현대 사태 등으로 은행의 추가 부실 우려가 제기되고 주거래기업인 쌍용양회의 유동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제2차 구조조정 대상 은행으로 거론되는 치욕을 맞았다.


8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정부는 공적자금 회수 차원에서 조흥은행을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김대중 정부가 마무리하지 못한 매각 협상을 현 정부가 이어받아 강행했고 결국 지난 19일 공자위의 결정으로 노조를 포함한 임직원들의 ‘홀로서기’ 소망은 허무하게 끝날 위기에 놓인 셈이다.

/ phillis@fnnews.com 천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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