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新온고지신] 삼성, 민족 자립경제 주춧돌로 탄생

김승중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6.29 09:44

수정 2014.11.07 16:22


로마가 하루에 만들어지지 않았듯, 오늘날의 삼성그룹의 모습도 우연히 달성된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탐구?^개척정신으로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 우리나라 경제에 새 지평을 연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과 87년 취임하면서 ‘제2창업’을 선언한 이건희 회장의 부단한 개혁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삼성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꾼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93년 6월)’이 더해졌다. 이 때부터 삼성은 ‘양적’ 경영에서 ‘질적’ 경영으로 대전환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5일 신경영 선언 10년주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미래경영의 중심 키워드를 또 다시 던졌다. 삼성의 ‘제2 신경영’ 핵심인 ‘천재경영’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파이낼션뉴스는 ‘新온고지신-도전과 극복 그리고 혁신’ 시리즈를 통해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경영혁신에 대한 철학과 그 기법을 조명하기로 했다. 이는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에서 진정한 기업정신의 발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척자 정신으로 한국경제 견인=우리 기업사에서 이병철 회장 만큼 크고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기업인은 없을 것이다. 해방이후의 궁핍했던 시절에서 60∼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거쳐 80년대의 국제화 시대에 이르는 도정에서 이병철 회장은 언제나 자유기업주의의 기수로서, 창업과 성공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앞서가는 경영인으로서 이 나라 민간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그는 분명 기업의 부침이 무상한 우리나라에서 50년간 사업의 길을 걸어오며 재계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거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손대는 사업은 언제나 이 나라 제일의 기업으로 자리를 굳혔고, 그의 손을 거친 물건만큼은 믿을 수 있다는 신화를 창조해냈다.

한국전쟁 와중의 산업 불모지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일으켜 근대산업의 첫 장을 열었으며 60년대에 연산 33만t 규모의 한국비료공장을 세웠다. 70년대의 고도성장기에는 기계·석유·전자 등 중화학공업으로 수출에 앞장섰고, 80년대엔 반도체·생명공학 등 첨단산업으로 국제경쟁사회에서 기술 한국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같은 가시적 업적과 성공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50년에 걸쳐 한결같이 기업인의 외길을 걸으면서 보여준 사업보국의 숭고한 기업이념과 언제나 한 걸음 앞서가는 경영능력,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와 기업경영에 있어 무한추구의 집념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79년 미국의 뱁슨대가 이병철 회장에게 최고경영자상을 수여할 때 이 대학의 소렌슨 총장은 이렇게 이병철 회장의 공적을 찬양했다.

“이병철 회장이 새로운 사업을 일으킨 것은 항상 그 사업의 시장성이 가장 낮은 수준에 있을 때였고 극히 곤란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끊임없는 파이어니어 정신으로 성취한 여러 사업의 업적은 사회에 대한봉사, 바로 그것이었다.”

소렌슨 총장이 지적했듯이 이병철 회장이 기업가로서 남다르게 간직한 것은 바로 사업을 통한 봉사의 정신,사업보국의 이념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경영에서 사람을 가장 중시, 사원의 공개채용제도를 가장 먼저 실천하고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했다. 우리나라 기업에 있어 현대경영 기법을 가장 앞서 도입하고 개화시킨 것이다.

결국 이병철 회장이 없었다면, 그가 일찍이 69년 전자산업을 일으키는 혜안이 우리 땅에 있기 어려웠을 것이고, 80년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반도체 호황을 예측, 과감히 투자하는 모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병철 회장을 ‘창조자적 기업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완수한 기업인’이라고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수입대체 산업을 통한 사업보국 결심=“‘삼(三)’은 크고 많고 강하다는 뜻이며 우리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지. ‘성(星)’은 밝고 높고 깨끗이 빛나며 또 영원한 그 무엇이야. 이런 바람을 담아 ‘삼성(三星)’이란 이름을 지었어.”(고 이병철 삼성회장)

삼성의 모태는 1938년 3월1일 설립된 삼성상회(三星商會)다. 이회장이 경남 마산에서 정미업과 운수업으로 쌓은 사업수완을 밑천으로 대구시 수동(현 인교동)에 삼성상회를 열었다. 이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됐다. 청과류와 건어물을 모아 만주와 베이징 등지에 팔고 국수제조업(별표국수)으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이회장은 48년 11월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상호도 삼성물산공사로 바꿨다. 회사 이름에 공사(公司)를 붙인 것은 주거래선인 화상(華商)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주식회사 체제로 출발했으며, 주식의 75%를 투자한 이병철 회장이 사장을 맡았다. 삼성물산공사는 홍콩·마카오·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설탕·면사·재봉틀·의약품·철판·비료 등 생필품을 수입하는 한편, 마른오징어와 한천 등의 해산물과 면실박(棉實粕)을 수출했다.

기업환경 변화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모험적인 개척정신, 지칠줄 모르는 추진력을 갖춘 선대 회장이 이끄는 삼성물산공사는 이처럼 순항을 거듭하며 재계의 ‘기린아’로 등장했다. 사업 시작 1년반만인 1950년 3월 결산에서 1억2000만원의 순익을 기록했다. 무역규모로 보아 당시 상공부에 등록된 543개 무역업체 중 7위였다.

삼성물산공사의 놀라운 성장은 시장의 수급을 꾸준하게 파악하는 경영능력과 선대회장 특유의 경영방침이 주효했다. 이병철 회장은 자본금을 일정한 규모로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투자해서 응분의 이익배당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능력에 따른 대우와 신상필벌의 기풍을 확립, 사장은 물론 평사원까지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 전쟁의 와중에서도 생필품을 들여다 팔았다. 53년엔 제당(製糖)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년만에 설비를 늘려야 했다.

사명을 ‘제일’로 정한 것은 알기 쉽고 부르기 쉽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슨 일에나 제일의 기개로 임하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항상 경제계의 제일주자로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크게 기여해 나가자는 결의를 담은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수입대체산업의 효시인 제일제당의 설립은 종래의 상업자본으로부터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현대 경제사에 있어서 큰 분기점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54년엔 제일모직을 세웠다.
“먼 장래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국제경쟁을 이겨낼 수 있는 시설과 품질을 유지할 만한 국제수준의 대단위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이병철 회장의 생각에 따라 제일모직은 처음부터 대규모 공장을 추진했다. 그래야만 생산원가를 낮출 수 있고, 양질의 상품을 염가로 공급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삼성은 물산과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3사를 주축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 sejkim@fnnews.com 김승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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