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新온고지신] 삼성, 한국 대표기업으로 우뚝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6.30 09:44

수정 2014.11.07 16:21


삼성은 역사의 발전단계에 충실하게 순응한 기업이다. 우리나라 기업사를 다시 쓰려는 삼성맨들의 도전의식 때문이다.

제일제당→제일모직→삼성물산→삼성전자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이를 입증해 준다. 제일제당·모직 시절에는 우리나라 생필품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기업의 형태였다. 그리고 삼성물산은 국제화시대를 개척했다.

이어 ‘미래경영’의 효시인 삼성전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때부터 삼성경영의 알파요 오메가인 ‘초일류’는 시작됐다. 이것은 단순한 한 기업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의 세계사적 운명과 일치하는 사건이다.


◇수출역군 삼성물산=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해 수입대체산업을 일으켜 외화절약과 국민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한 삼성은 국내수요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됐다.

1960년대 들어 정부가 수출증진에 박차를 가하자 삼성도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기구를 확대·강화하고 해외시장 개척과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66년 말부터 미국과 유럽이 경기침체에 빠지자 우리나라 종합무역상사 1호인 삼성물산은 섬유류를 제외한 주요 공산품의 수출대상국을 베트남(월남)으로 바꾸고 100여척의 철부선(鐵艀船) 수출계약을 체결해 우리나라 중공업제품 수출의 전기를 마련했다.그 결과 69년에 수출업체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처럼 삼성은 경제개발과 수출을 통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국가적 목표에 앞장섬으로써 국가경제를 선도하는 ‘국민기업’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삼성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해 전자산업에 뛰어들어 전자부품의 수입대체와 수출상품화를 도모했고, 아울러 70년대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금융업 진출과 한국비료 헌납=58년 안국화재를 인수하면서 보험업에 뛰어들었던 삼성은 62년 11월 안국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를 인수하는 등 금융업에도 삼성의 깃발을 올렸다. 안국화재로 손해보험업계 선두주자로 등장한 삼성은 63년 7월 동방생명보험주식회사(현 삼성생명)를 인수해 생명보험업에도 진출했다.

동방생명을 인수한 삼성은 자본과 경영을 분리해 근대적 경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기업이미지를 쇄신했다. 또한 삼성의 경영이념에 입각한 신용주의를 관철해 보험업의 근본인 공신력을 더욱 다져 나갔다.

삼성에는 이와 같이 평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삼성은 다시 일어섰고 지난날의 정치적 혼란과 격동 속에서도 삼성은 꿋꿋하게 성장, 발전해 왔다.

이중 하나가 한국비료 사건이다. 이병철 회장은 64년 ‘야심작’ 한국비료를 설립한다. 당시 세계 최대의 요소비료 공장(33만t). 그러나 한비는 공정률 80%를 보이다 67년 10월에 국가에 헌납된다. 사카린 원료로도 사용되는 비료생산원료(OTSA)가 유출됨으로써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비화됐던 것.

삼성은 당시 한비지분을 요구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나 어쨌든 이 사건으로 그룹이 존폐위기로 몰려 헌납해야 했다(삼성은 이후 94년 7월 한비공개입찰에 참여, 한비를 인수한 뒤 삼성정밀화학으로 개명한다).

그후 대법원에서 이 사건을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밀수의혹을 씻을 수 있었다.

◇전자산업시대 개막=한비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병철 회장은 일선에 복귀하면서 삼성의 진로에 일대 전기가 될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한다.

이회장은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노동력·부가가치, 그리고 내수와 수출전망 등 어느 모로 보나 우리나라 경제단계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68년 2월26일 삼성물산에 개발부를 설치하고 전자산업에 대한 신규투자 문제를 검토케 했다. 신규사업계획이 주도면밀하게 완성될 무렵인 6월12일 이병철회장은 일본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자산업 진출을 대외에 선포했다.

그러자 국내 전자업계가 큰 타격을 받는다는 이유로 기존 메이커는 물론 언론과 국회의원까지 가세해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 저지운동을 펼쳤다. 이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고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자 정부는 68년 6월19일 전자부품을 수출전략산업으로 개발한다는 요지의 전자공업진흥 8개년 기본계획을 발표했고,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 길이 열리게 됐다.

전자산업 진출에 있어 선대 회장은 기존업체의 단순 조립생산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외국 선진기업의 기술을 조기에 습득해 이를 국산화하는 것이 한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부품국산화의 촉진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대 회장의 의지에 따라 탄생한 것이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69년 1월13일)이다. 비록 후발기업이긴 했지만 삼성전자를 세계굴지의 종합전자메이커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전자단지의 대형화, 공정의 수직계열화, 기술개발능력의 조기확보라는 3대원칙을 세우고 공장부지를 물색했다.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69년 10월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에 45만평, 경남 울주군 가천지역에 70만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했다.

“전자산업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다. 그리고 기술의 메리트, 규모의 메리트로 파고 들어가야 성공한다. 지금 이 땅이 크게 보일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더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일본 도쿄의 산요(三洋)단지는 40만 평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한 평이라도 크게 지어야 한다.”

이병철 회장의 이같은 선견은 그대로 적중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삼성전자 경기 수원단지는 빈터는커녕 부지가 모자랄 지경에 이르렀다.

삼성전자는 공장부지를 확보하고 난 다음 기술인력 확보에 나섰다.
전자제품은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기에 높은 수준의 기술자가 필요했다. 삼성전자는 기존업체의 인력을 스카우트하기보다는 해외기술연수생을 공채하고, 그룹 내 중견사원을 뽑아 일본의 전자메이커에서 기술연수를 시켰다.
국내시장에서의 인력 스카우트보다는 해외연수로 인력을 확보한 것이다.

/ sejkim@fnnews.com 김승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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