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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온고지신] 삼성, 이건희 회장 신경영선언

김승중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7.02 09:45

수정 2014.11.07 16:14


‘양적 경영에서 질적 경영으로의 모든 발상을 전환하라.’

이건희 회장이 93년 6월7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선포한 ‘신경영’의 핵심이다. 여기엔 변화에 극복하지 못하면 삼성은 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회장은 “적당히 2류로서 만족하면서 제품만 양적으로 많이 팔아먹으면 된다는 안일한 사고를 철저히 버리고, 선택과 집중의 위기의식을 키워나가야 한다”면서 삼성맨 모두에게 강력한 개혁을 주문했다.

이 때부터 삼성의 쉼없는 변화는 시작됐다. 삼성은 상징적으로 모든 부실한 제품들을 태워버렸다. 월드 베스트를 향해 목표를 새롭게 설정했다.
사람을 다시 뽑고 설비를 바꾸고 낙오자를 배제시키고, 내부로부터의 개조를 시도했다.

이러한 준비가 무르익었을 때 공교롭게도 IMF가 터졌다. 하지만 IMF라는 위기는 삼성에는 커다란 기회였다. IMF를 계기로 삼성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며 가능성없는 사업을 정리하고 30% 이상의 인원을 감축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에 오히려 역으로 전자생산라인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래서 삼성은 다시 태어났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후쿠다보고서’로 출발한 108일의 대장정=93년 6월4일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이건희 회장 주재로 삼성전자 기술개발 대책회의가 열렸다. 윤종용 삼성전기 사장(현 삼성전자 부회장),이수빈 비서실장(현 삼성사회봉사단장), 후쿠다 삼성전자 디자인고문 등 10여명이 몇 시간 동안 머리를 맞댔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의를 끝낸 이회장이 삼성 임원들만 돌려보내고 후쿠다 고문을 포함한 3,4명의 일본측 고문을 따로 객실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일본 전자업체의 선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이회장이 지난 88년부터 스카우트한 인물들.

“그동안 삼성전자에 대해 보고 느낀 점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주세요.” 이회장이 짧은 한마디로 침묵을 깼다. 이회장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과 부탁의 뜻을 눈치 챈 고문들은 하나 둘 말문을 열었고 대화는 밤을 하얗게 지새도록 이어졌다. 삼성전자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쏟아져 나왔다.

후쿠다 고문은 뜻밖에도 이 자리에서 이회장에게 삼성전자에 대한 문제점을 담은 보고서를 전달하게 된다.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 ’다.

이회장은 다음날 오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이회장은 호텔로 가 여장을 풀자마자 삼성비서실 SBC팀(삼성 사내방송팀)에게서 받은 비디오테이프를 틀었다. 그 테이프에는 세탁기 제조과정에서 불량품 양산과정이 있는 그대로 취재돼 담겨 있었다. 이회장은 몸을 떨었고 곧바로 서울로 전화를 걸어 이학수 비서실 차장(현 삼성구조조정본부장)에게 “사장들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라”고 지시했다.

7일 프랑크푸르트 켄벤스키호텔. 이회장이 비장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비상경영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참석자들의 긴장은 극에 이르렀다. 이회장은 삼성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질경영의 실패를 질타해 나갔다. 이 자리에서 이회장은 결국 질경영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경영을 선포하게 된다. ‘삼성 신경영 ’이다.

이 회의에는 윤종용 사장(현 삼성전자 부회장), 비서실 김순택 경영관리팀장(현 삼성SDI 사장), 현명관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삼성 핵심 경영진 200여명이 참석했다.

◇신경영에 무엇을 담았나=삼성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언한 내용을 근간으로 이회장이 해외에서 교육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해 ‘삼성 신경영’ 체계를 정립했다.

삼성 신경영은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상당히 복잡하다. ‘삼성 신경영 실천위원회’는 93년 9월10일 ‘삼성 신경영 : 나부터 변해야 한다’를 발행해 신경영 철학을 정리했으며, 97년 6월7일 신경영 선언 4주년을 맞아 일부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완했다.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자기반성을 통해 ‘남의 탓을 하기보다는 나부터 변화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인간미·도덕성·예의범절·에티켓 등을 기본으로 해 변화를 한 방향으로 통일하며, 질 위주 경영, 국제화, 정보화, 복합화를 이룩해 국제 경쟁력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인류사회에 봉사하는 21세기 세계 초일류기업이 된다.”

삼성 신경영이 철저한 현실인식과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이회장의 그 당시 발언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이회장은 “18만 삼성인을 책임지고 있는 그룹의 회장으로서 나는 특히 92년말부터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절박한 위기감을 느껴왔으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토로한후 “삼성이 이대로 가면 초일류기업 실현은 커녕 3류로 전락하고 마는 벼랑 끝에 서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변화, 변화, 변화=이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계열사 사장단이 모인 자리에서 “나부터 변해야 산다”고 역설했다. 이회장은 이어 “처자식만 빼고 다 바꿔보자. 고객의 요구에 혁신적으로 대응하고 사회 요구에 정직하게 책임지는 기업이 초일류기업이다. 앞으론 초일류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주문했다.

신경영에서 변화의 기본은 ‘사람의 변화’였다. 인간이 바로 서지 않고는 조직 내부 문제인 이기주의, 권위주의, 도덕불감증을 치유할 수 없으며, 진정한 의미의 초일류기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 삼성은 ‘경쟁력은 기업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판단, 경쟁력 증진을 통해 회사를 변화시켰다.

기업의 수명이 유한하고 세계 초일류기업이라고 알아주던 회사들이 도태되는 현실을 볼 때, 기업에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삼성 신경영은 경쟁력 제고 방안을 질 위주 경영과 국제화, 복합화, 정보화의 네가지로 규정했다.


이회장은 특히 ‘질을 위주로 한 경영’을 강조하기 위해 강도높은 표현과 비유를 사용했다. ‘불량은 적’ ‘불량은 악의 근원’, ‘불량은 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삼성의 변화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 sejkim@fnnews.com 김승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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