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新온고지신] LG, 화학 및 전자산업의 신기원 이룩

차석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07.07 09:46

수정 2014.11.07 16:05


50년대 LG가 동토(凍土)나 다름없던 척박한 산업환경에서 꽃피운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은 국가적으로나 경제·사회적으로 커다란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고인이 된 이재영 전 국회의장의 글에서 당시 LG가 나라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상공부장관이었던 이재영 전 의장은 락희화학(현 LG화학)에서 국내 처음으로 개발 생산한 ‘플라스틱 빗’을 국무회의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준다. 당시 사출성형기를 해외에서 들여와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만들어낸 플라스틱 제품을 이대통령에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의장은 “각하, 이제 이런 제품을 우리나라에서도 생산하게 됐습니다”라고 보고 했다. 이대통령은 “정말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오” 하면서 직접 빗을 하나 집어 하얀 백발머리를 빗었다.


그리고는 “상공부 장관, 나 이거 하나 주오” 하면서 감격하고 기뻐했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올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한국 화학산업의 한 획을 긋는 쾌거였던 것이다.

LG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해 59년 6월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을 자체기술로 개발하는 등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처럼 ‘락희’는 새로운 사업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며 화학과 전자산업을 양 축으로 한 LG의 기틀을 닦았다.

◇금성사, 전자산업의 신기원 열어=58년 어느날 연암 구인회 사장은 주요 간부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나는 앞으로 전자공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금성사의 출범을 예고한 일이었다. 그는 전자공업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개척자적 정신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는 어려움과 초창기의 시련들을 헤쳐나가자고 당부했다.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구인회 사장의 말에 누구 하나 반대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날부터 모든 임직원들은 발로 뛰기 시작했다. 기본사업계획서를 만들고, 필요한 생산시설과 연차 생산품목및 생산량, 기술요원 확보대책 등을 마련했다.

우선 기계시설 도입을 위해 1차로 8만5195달러의 예산을 확보했다. 또 당시 우리나라에 와있던 독일 기술자 ‘헨케’를 2년 계약으로 기술고문 및 생산책임자로 채용했다.

그리고 연암은 새 회사의 명칭을 ‘금성사(金星社)’ 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금성사’는 지구나 별처럼 우주 천체는 화려하고 신비할뿐 아니라 무궁한 수명을 상징하고 있어, 전자제품의 이미지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성합성수지공업사’를 금성사로 개칭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공업회사가 58년 10월1일 마침내 첫발을 내디뎠다. 금성사는 60년 3월 국내 최초 선풍기인 ‘D-301’, 61년 7월에는 역시 국내 최초의 자동전화기를 생산했다.

또 63년 10월에 대규모 전기·전자공장을 부산시 온천동에 건설해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에 새 장을 열었다. 온천동 공장에서 우리나라 전자 공업의 꽃을 피운 금성사는 64년 4월 국내 최초의 자동 전화교환기를 개발해 양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금성사는 전자산업에 더욱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65년 4월 국내 최초로 냉장고를 개발한 것을 비롯해, 국내 최초로 흑백TV(66년 8월), 에어컨(68년), 세탁기(69년 2월) 등 국민생활에 밀접한 전기전자 제품을 국내 최초로 잇따라 개발·생산해 ‘골드스타(Goldstar)’의 이미지를 국민 속에 깊숙이 뿌리 내렸다.

62년 5월에는 한국케이블공업(현 LG전선)을 설립했다. 10월에는 연산 4000t의 전선 및 케이블을 생산하는 안양공장을 건설,전기·전자산업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숙원인 정유사업 성공 진출=1960년대 경제개발의 본격화로 우리나라의 주에너지원이 석유로 전환되면서 석유정제산업은 한국공업화의 중추를 담당하는 전략사업이 됐다.

일찍부터 에너지산업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연암은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 일반기업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던 정유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전해 LG의 오랜 숙원이었던 플라스틱 원료 제조사업에 필요한 정유사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LG는 66년 12월7일에 미국의 칼텍스사와 역사적인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고, 67년 5월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인 ‘호남정유’(현 LG-Caltex정유)를 설립했다. 이어 69년 9월 하루 6만 배럴의 정유공장을 준공했다. 성장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에 앞서 66년 8월에는 미국의 콘티넨탈카본사와 합작으로 한국콘티넨탈카본 (현 LG화학에 합병)을 설립하고, 69년 10월 인천에 공장을 건설해 우리나라 고무공업에 새로운 역사의 막을 열었다.

◇69년,그룹 본사 서울 시대 개막=LG는 60년대 중반 정유업 등 기간산업에 진출하는 등 규모가 성장함에 따라 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경영의 통합 조정 필요성을 느꼈다. 연암은 66년 LG화학을 비롯한 각사의 공동대표이사 회장에 취임, 전문적인 경영체제를 지향하고 서울사무소에 기획조정 위원회를 설치해 주요 프로젝트를 담당케 했다. 68년에는 기획조정실을 신설, 자매사간 통합조정 차원의 기획 기능을 강화했다.

69년은 경영사적으로 보다 뜻깊은 해였다. 기업공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 과감하게 그룹의 모회사인 LG화학을 공개했다. 특히 그룹 본사를 서울로 이전해 본격적인 서울시대를 열었다. 서울시대를 개막하면서 민간기업 최초로 전산체제를 구축하고 경영 선진화를 추진한 것이다.

그러던 차, 69년 12월31일 0시15분. 발전의 시대인 70년대를 바로 눈앞에 둔 이날, LG의 창업자 연암 구인회 회장이 63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이에 앞서 연암은 장학육영사업, 문화사업, 사회복리사업에 기초한 연암문화재단(현 LG연암문화재단)을 설립, 기업이윤의 사회환원과 기여에 나섰다.

◇구자경 회장 취임으로 제2의 도약 계기 마련=LG는 70년 1월9일,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금성사 부사장(현 LG 명예회장)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해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는다.

경영 총수의 승계 경험이 전무했던 한국 재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며 취임한 구자경 회장은 기존의 경영 규모를 밖으로는 더욱 확장하면서 안으로는 경영 내실화를 보다 튼튼히 하는데 힘썼다.

상남은 경영진 개편을 마무리한 70년 1월 “70년대는 LG가 국제화로 돌입하는 전환기”라고 밝히면서 안정된 성장과 국제화를 70년대의 주요정책으로 추진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같은 정책방향은 60년대에 비해 변혁의 속도가 보다 가속화되고 그 내용 또한 다양화할 것으로 예견된 데 따른 것이다.
무엇보다 급변하는 기업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경영합리화 시책의 과감한 추진을 펴기 위함이었다.

‘내실있는 안정적 성장 정책’을 지표로 한 상남의 일관된 경영 원칙은 ‘자본과 경영의 분리 작업 적극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산업의 고도화 선도’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한 기업 활동의 질적인 선진화 추구’ 등으로 집약된다.
상남의 이같은 경영철학과 기업정신은 70년대의 LG를 일궈내는 원동력이 됐다.

/ cha1046@fnnews.com 차석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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