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강(蓮崗) 박두병 회장의 ‘용단’으로 국내 최초로 전문경영인시대를 연 두산그룹은 1970년대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사업다각화에 성공하면서 제 2의 도약기를 열었다.
이 시기에 동양맥주는 미주·월남 등의 수출을 통해 세계속에 ‘OB 브랜드’를 심고, 동산토건(두산건설 전신)은 중동시장에서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며 ‘세계화 경영’을 실현했다.
또 1980년대 접어들어 ‘두산가 3세’인 박용곤 회장이 전격 취임한 후 ‘확장과 개척정신’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면서 그룹은 최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오일쇼크 극복과 ‘전자산업’ 진출=정수창 회장이 ‘국내 전문경영인 1호’로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한 후 국내시장엔 오일쇼크 폭풍이 휘몰아쳤다. 더구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박두병 회장이 건강악화로 타계하면서 두산그룹은 최대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두산은 중동전쟁으로 오일쇼크 충격파가 더욱 커질 무렵,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한다. 당시 내수는 물론 월남·일본·홍콩·미얀마 등 해외시장에서 판매량이 급증, 매출액이 커진 OB맥주는 동양 최대규모의 맥주공장 신축 계획을 세운다. OB맥주는 경기도 이천에 일본의 기린맥주보다도 2배이상 규모가 큰 신규공장 건립을 추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오일쇼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주력 계열사, 동산토건과 윤한공업은 극적으로 위기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천공장 건설 수주로 동산토건은 그 해 국내 도급순위 17위로 껑충 뛰어올랐으며, 윤한공업도 신규 맥주공장에 설치할 설비공사를 발판으로 오일쇼크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
또한 이 무렵, 미국의 전자회사인 오크그룹이 운영했던 ㈜한국오크가 경영난으로 휘청거리자, 두산은 한국오크 인수를 계획한다. 이 프로젝트는 생전의 박두병 회장이 꿈꿔왔던 것이었다. 박두병 회장은 항상 ‘국가기간산업 진출’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마침내 두산의 전자산업 진출은 박두병 회장이 타계한 이듬해인 1974년 1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미국의 오크그룹과 두산은 합작형태로 한국오크공업㈜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 후 한국오크공업은 모든 전자제품의 기초가 되는 동박적층판을 생산, 수출까지 하면서 훗날 두산전자로 변신하게 된다.
◇OB맥주와 두산건설의 ‘세계 경영’=1981년 3월2일, 두산그룹은 새 역사를 맞게 된다. 정수창 전문경영인시대가 막을 내리고 두산가 3세 경영인인 박용곤 회장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박용곤 회장은 취임과 함께 ‘두산의 세계화 경영’에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경제상황이 저유가?^저환율?^저금리로 이른바 3저(低)현상으로 수출여건이 급속히 호전되자 박회장은 중대 결단을 내렸다. 우선 ‘OB맥주의 세계화’에 주력하기로 했다. 이미 1970년대를 거치면서 아시아권에서 브랜드 파워를 키운 OB맥주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실천하기위해 박용곤 회장은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맥주 메이커인 ‘하이네켄’과 기술 및 상표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에서 생산을 시작한 하이네켄 맥주는 예상외의 호응을 얻으면서 해외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하이네켄은 홍콩으로 수출됐으며, 특히 미국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동포들이 거주하는 LA는 물론 뉴욕, 시카고 등 미국 전역에서 하이네켄 판매는 급증했다. 또 박회장은 알코올이 없는 맥주인 ‘NAB’를 개발해 중동지역에 수출을 시작했다. 음주를 할 수 없는 중동지역에서 NAB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OB맥주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됐다.
이 무렵, 중동건설 붐이 일면서 두산건설의 전신인 동산토건은 세계화 경영을 통해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동산토건은 중동 최대공사인 주베일공단내 폐수처리시설공사, 사우디아라비아 킹칼리드 국제공항 지원시설 공사, 이집트의 생의학 연구실 신축공사 등을 수주했다. 또 걸프만의 스웨즈 석유회사 사옥 신축공사 등을 수주하면서 총 3억달러를 넘게 벌어들였다. 이를 통해 동산토건은 국내 건설업체 중 메이저 회사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 pch7850@fnnews.com 박찬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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