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은행들의 플레이오프

이장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01 10:09

수정 2014.11.07 13:34


2003년 프로야구 플레이 오프 시즌이 다가왔다. 올해는 현대·기아·삼성·SK 등 4강이 이 축제에 초대받았다. 플레이오프는 선수들의 피땀이 어린 정규리그 대장정을 마감하고 한해 농사를 결산하는 프로야구의 백미이자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또다른 시작이다.

은행권도 플레이 오프시즌에 접어들었다. 4강엔 국민·우리·하나·신한(+조흥)은행이 올랐다. 금융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98년 이후 정규리그만 5년을 끌어온 빅게임의 승자가 가려진 것이다.


해태타이거즈, MBC청룡, OB베어스 등 옛 명문구단이 한때 프로야구를 휩쓸었던 것처럼 은행권에서도 ‘조·상·제·한·서’라 불리는 옛 5강이 주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하나, 신한 등은 약체였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 신한과 하나가 플레이 오프에 오르리라고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은행권의 합병게임은 이변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플레이 오프는 정규시즌의 마감을 뜻함과 동시에 또다른 게임의 시작을 알린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4강에 오른 은행이 이제 살아 남았다고 안도하는 순간, 그 은행은 플레이 오프 경쟁에서 탈락되고 만다. 진정한 리딩뱅크를 가리기 위한 전쟁은 지금부터다. 빅4 은행중 과연 누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를 것인가.

국민은행은 정규리그 1위에 오른 현대구단과 흡사하다. 현대는 가공할 만한 타력과 철벽투수진, 흠잡을 데 없는 수비진 등 막강 전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감독의 용병술까지…. 250조원에 이르는 국민은행의 자산과 전국 1300곳에 포진한 점포망, 김정태 행장의 카리스마는 마치 한국시리즈 정상을 예약해 놓은 듯하다. 그러나 약점도 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력의 부재를 현대가 고민하는 것처럼 국민은행도 덩치에 비해 뭔가 엉성하다. 말하지 않아도 착착 돌아가는 응집력이랄까 그 무엇이 없다.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기아는 우리은행을 빼닮았다. 기아가 80∼90년대 프로야구계를 풍미한 것처럼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과 한일은행도 금융계를 주름잡은 적이 있었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도 비슷하고 극적으로 재기한 점도 똑같다. 올 시즌 기아가 막판 스퍼트로 2위를 차지한 것처럼 우리은행도 올해 독보적인 실적을 올렸다. 저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헝그리 정신만으로, ‘하면 된다’는 신념만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은행이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영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대내외 환경(민영화 등 지배구조 개선)이 아닐까.

신한은행이 프로야구단 삼성과 닮았다는 데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승엽을 비롯, 스타위주의 화끈한 플레이를 펼치는 삼성은 반면 결정적 승부에 약하고 화려함 만큼 내실이 충실하지 못하다. 번번이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는 것도 내실이 약한 때문이리라. 그러나 신한은 다르다. 정상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가는 신한은행은 빈틈이 없어 보인다. 결정적 승부에서 조흥은행을 인수하는 뚝심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신한과 삼성의 닮은점은 게임 스타일보다는 구단 운영스타일일 것이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꼼꼼한 분석, 과감한 투자, 우수한 인재 발굴 등 구단 운영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삼성의 진면목을, 은행권의 삼성이라 불리는 신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신한의 잠재력을 경쟁은행들도 두려워한다. 그러나 왠지 둘 다 뚝배기 같은 정이 느껴지진 않는다. 잘나갈 때는 몰라도 어려워질 때 고객들이, 관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다.

하나은행은 은행권의 SK 와이번즈다. 둘다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딛고 돌풍을 몰고 왔다. SK가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하나은행이 조그만 단자회사에서 출발, 충청은행과 보람은행, 그리고 서울은행을 잇달아 인수하며 자산 100조원의 빅4은행으로 성장한 것처럼 SK도 다른 팀의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며 약체 이미지를 씻어냈다. 외인부대를 배척하지 않고 같은 조직과 문화 속으로 섞어버리는 융화정책도 장점이다. 둘다 탄탄한 조직력을 갖췄다. 내실이 묻어난다. 그러나 돌풍은 영속되지 않는다. 타력(영업력)을 더 갈고 닦아야 하며, 투수진(리스크 관리)도 보강해야 하고 스타(고객 확보)도 키워야 한다.
그래야 돌연한 바람이 아니라 항상 부는 바람이 되며 이변이 아닌 실력이란 말이 나온다.

은행들의 플레이 오프는 프로야구보다 훨씬 길고 치열하며 고도의 전략을 필요로 하는 빅게임이다.
아마 승패는 4∼5년 후쯤 갈라지지 않을까. 본지가 매주 화·목요자에 게재하는 시리즈 ‘금융개혁 5년-글로벌 뱅크를 꿈꾸며’가 은행들의 분전을 유도하며 한편으론 플레이 오프를 더 재미있게, 잘 관전할 수 있는 알찬 자료가 되길 기대해 본다.

/ jklee@fnnews.com 이장규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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