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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영국의 ‘네셔널 트러스트’

장승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07 10:11

수정 2014.11.07 13:25


영국의 유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늘 마주치는 이름이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 바로 역사적 명소들을 관리하는 단체의 이름이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설립된 것은 1895년의 일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무분별한 산업화와 도시 개발로 인해 영국의 문화유산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옥타비아 힐 여사와 로버트 헌터경, 그리고 하드윅 론슬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물론 이 기구가 하는 일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나 임야 등을 구매해 이를 가꾸고 보존하는 것으로 정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순수한 민간 단체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내셔널 트러스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걸쳐 24만8000헥타르에 이르는 임야와 600마일가량의 해변, 그리고 200여개에 이르는 역사적 건물과 정원 등을 돌보는 대형 단체로 성장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자로 유명한 T E 로렌스가 소유했던 클라우즈 힐의 욕장이나 로버트 애덤의 화려한 인테리어로 유명한 캔들스톤 홀, 토머스 텔포드가 1826년 완공했다는 웅장한 규모의 콘위 서스펜션 브리지 등은 모두 내셔널 트러스트에 의해 보수 유지되는 문화유산들이다.

문화 유적들이라 해서 반드시 수백년의 역사를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민족적 사료로서 의미 있는 문화 유산들은 그 역사가 10년이 안되었더라도 보존가치가 있다는 것이 내셔널 트러스트의 설립취지이자 운영방안이다. 신축적인 사고는 문화 유산의 경계를 넓히기도 한다. 숲이나 농장, 황야지대, 고고학적인 지형 등 자연환경 역시 이 기구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주요한 국가 자산들이다.

내셔널 트러스트의 소유물은 대부분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재정의 상당부분은 방문객의 입장 수익과 정규 회원들의 회비, 그리고 후원자들의 자선금으로 충당된다. 회원의 등급도 다양해 연간 단위는 물론 종신제 회원이나 가족 할인 회원, 부부나 연령에 따른 특별 회원 등 각각의 혜택이 다르다. 여기에 각종 기념품은 물론이거니와 방문 장소마다 각기 다른 메뉴의 음식점도 지역 특산물과 역사적 전통을 경험해 볼 수 있는 별난 재미를 준다. 휴가철이면 시골의 농가나 전통 가옥을 일반에게 유상 제공하는 300여채의 별장도 있다. 올 여름 발표된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내셔널 트러스트는 지난 한해동안 3100만명의 연간 회원과 1260만명에 이르는 방문객 등으로 설립 이래 가장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두말할나위 없이 수익금 일체는 다시 문화재의 구입 및 관리, 보호에 사용될 예정이다.

물론 영국에서 자선 기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법정 자문 기구인 잉글리시 헤리티지도 유사한 단체다. 역사적인 환경을 이해하고 발견하며 보호하자는 취지로 설립된 이 기구는 1983년 제정된 내셔널 헤리티지 법에 의거, 영국 의회에 관련 사항을 정규적으로 보고해야 하는 공식 단체다. 주무 부처이자 예산을 집행하는 곳은 정부의 문화?^미디어?^스포츠부이지만 이밖에도 환경부나 교통부, 종교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한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 10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는 스톤 헨지나 런던 북부 햄스테드 히스의 유명한 켄우드 하우스를 관리하는 곳은 바로 이 기구다.

그러나 내셔널 트러스트의 장점은 국가나 지방 행정기구가 아닌 영국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내셔널 트러스트의 원활한 운영 이면에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의 참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규 직원은 4000여명에 불과한 반면, 이와 비슷한 규모인 3800여명의 직원은 모두 계절별로 나눠 참가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물리적으로 환산하자면 연간 200만 시간의 노동력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셈이다. 내 고장의 문화 유산을 스스로 돌보겠다는 지역사회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발로다. 덕분에 대부분 이곳의 직원들은 친절하고 열성적이지만 그렇다고 어설프게 장사꾼 취급을 하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봉사자들에게 이 유적들은 문화적 자존심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대상이다.

일반에게 개방된 충북 청원군의 청남대가 늘어난 방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 열기가 계속돼 준다면 우려되던 재정 적자가 어느 정도 메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걱정스런 마음 또한 없지 않다.
‘대통령 별장’ 돌아보기가 혹여 지금까지 금기시되던 일의 반동에 불과한, 일시적인 ‘호기심’의 결과는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문화 유산이란 그 스스로의 존재 가치나 2만달러 수준의 국민소득 못지 않게 문화와 환경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성숙된 시민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래지향적 가치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원종원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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